자연 살리고 장소에 묻어가는 ‘약한 건축’이 새로운 패러다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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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호 26면

저자: 구마 겐고 출판사: 안그라픽스 가격: 2만원

얼마 전 5000억원의 예산을 들인 DDP가 개관하자 우리의 관심은 일제히 건축에 쏠렸다. 거대한 우주선 형상이 동대문운동장 부지 전체를 덮는 엄청난 규모로 서울에 ‘새로운 지형’을 만드니 건축에 있어 주변 경관과의 조화, 역사적 맥락 여부가 새삼 도마에 올랐다. 동시에 2년 연속 일본 건축가가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왜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없느냐는 한탄과 함께 탈산업시대인 21세기에 걸맞은 건축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까지 고개를 든다.

『나, 건축가 구마 겐고』

2013년 재건된 도쿄 가부키극장 설계자 구마 겐고의 경험담을 듣다 보면 대충 감이 온다. 2002년 베이징 대나무집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가 세계적인 건축가가 될 수 있었던 본령은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철저한 부정’에 있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건축은 ‘개인의 주택소유’라는 미국식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허구다. 본래 빌려 쓰는 개념이던 주택이 주택담보대출로 개인 소유의 환상을 심자 장식적 건축 대신 민중을 위한 단순한 건축이 등장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로 대변되는 싸고 튼튼한 콘크리트 건축이 곧 모더니즘이다.

구마는 콘크리트로 규정된 건축을 탈피해 ‘장소’라는 키워드를 구했다. 어디서나 통용되는 상품성을 무기 삼았던 20세기 모더니즘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그 장소에서만 가능한 특별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장소지향성의 다른 이름이 ‘약한 건축’이다. 산업시대의 마초적 건축, 영원할 것 같은 콘크리트 건축도 대지진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 휴지조각이더라는 반성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웠고, 자연과 환경, 인간과 역사가 먼저고 건축은 그 안에 숨어들어야 한다는 개념을 낳았다.

이런 개념을 실천한 프로젝트들은 과감히 ‘보이지 않는 건축’으로 완성됐다. 에히메현 오시마의 기로잔전망대는 산속에 파묻혀 입구밖에 보이지 않는다. 미야기현 도메시의 도요마마치 전통예능 전승관은 아예 건물을 짓지 않고 주위 숲을 무대장치 삼아 극장을 야외에 건설해 인기 관광지로 떠올랐다. 나가오카 시청사 아오레나가오카 역시 외관이 없다. 건물을 인접한 땅에 붙여 지어 외관이 없는 대신 커다란 중정에 사람들을 모은다. 에도시대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성으로 유명했던 나가오카의 역사를 재생하기 위해 실제 시민이 어떤 공간을 필요로 하는지 워크숍을 통해 결정해 갔다. 도쿄 가부키극장도 에도시대부터 이어진 가부키의 시간을 계승하는 것을 최우선했다. 오랜 세월 흥행주, 배우, 팬, 행인들 모두의 이야기 속에 존재해온 축제공간이라는 장소의 정체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는 『건축가, 달린다』다. 빌바오 구겐하임 이후 건축을 아이콘으로 도시를 살리려는 트렌드로 전 세계에서 건축공모전을 벌이는 바람에 먹고 살려면 달려야 한다는 자조가 섞여 있지만, 건축가는 발로 뛰어 ‘장소’와 만나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 현장 영상만으로 뚝딱 설계를 끝내곤 하지만, 현장에서 몸으로 느껴야 진정 그 장소에 필요한 건축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일본 건축가들이 앞서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에든 통용되게 지형 제약을 없애 자연과의 접점을 잃은 것이 20세기 건축이라면, 21세기 건축을 이끄는 것은 만국공통이 아니라 장소특정이요, 중심이 아니라 변경이다. 일본 건축가들은 산업사회에서 소외된 지방에서 가능성을 모색한 덕분에 자연을 살리고 장소에 묻어가는 ‘약한 건축’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다. 기상천외한 형태로 튀려 하는 ‘강한 건축’은 이미 낡았다. 현장의 땅을 밟고 그 땅의 사람과 자연, 역사를 품겠다는 철학이 새로운 건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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