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의 시대공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야 할 규제개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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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호 31면

고등학교 졸업반 때 준비했던 은행 취직시험에 ‘작문’이란 과목이 있었다. 점수 편차가 크게 나는 과목이어서 준비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준비 중 하나가 한자말 공부였는데 그때 가끔 썼던 말 중 하나가 ‘요원(燎原)의 불길’이었다. 벌판의 불길처럼 무서운 기세로 퍼져 가는 세력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사전에는 쓰여 있었다.

최근 요원의 불길처럼 규제개혁의 불길이 타고 있다. 글자 그대로 불이 붙어 확 타오르는 기세다. 하지만 아직도 그 불길이 정말 ‘규제의 초원’을 태울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불씨는 붙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꺼져 버렸던 과거 경험들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국민이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불길을 제대로 타오르게 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먼저 불길이 크게 번지려면 땅이 건조해야 하는 것처럼 ‘나쁜 규제’가 근본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원래 열려 있던 문을 특정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닫아놓은 것이 규제다. 그 문이 원래 닫혀 있던 것이라 생각하면 규제는 ‘시혜적’으로 풀어주는 것이 된다. 이 틀을 바꿔야 한다. 규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를 국민이 ‘읍소형’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규제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거꾸로 정부가 제시하도록 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규제 민원에 대해 규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행정기관이 일정 기간 내에 소명토록 한 것은 바로 이 규제 토양을 바꾸는 출발점이다. 규제의 ‘갑’과 ‘을’을 바꾸는 코페르니쿠스 식 전환인 것이다. ‘규제신문고’라는 창(窓)을 통해 누구나 언제든지 손쉽게 호루라기를 불도록 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둘째, 강한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규제비용총량제나 부처별 감축목표의 시행도 중요하지만, 어둠 속의 규제까지 햇볕 밑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야말로 강한 바람이다. 등록되지 않은 ‘숨은 규제’ 또는 ‘그림자 규제’를 일정시한까지 신고토록 한 것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신고하지 않은 규제를 원칙적으로 실효(失效) 또는 일몰시키겠다고 한 것은 이제껏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시도다. 신고를 받아 규제건수가 늘어나는 부담을 안더라도 ‘외형’이 아니라 정면으로 문제를 돌파하겠다는 ‘실질’을 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야 한다. 공무원의 소극적인 행태와 일하는 방식이야말로 불길을 막는 비(雨)다. 이런 점에서 규제개혁의 핵심은 공직자의 행태 변화에 있다. 지난 한 해 민관규제개선추진단에서 개선한 과제 중 32%는 법이나 제도 개선과 상관없이 현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부터, 그리고 모든 공직자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점이다.

불길을 막는 또 하나의 비는 이해 관계자 간의 대립과 반발이다. 적잖은 규제개혁이 기존 인센티브 구조를 바꾸면서 이해의 대립과 갈등을 수반한다. 진입 규제를 풀 때 새로운 진입자와 기득권층 간에 생기는 갈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권을 포함한 이해 관계자의 양보와 협조가 필요하다. 그래야 총론 찬성, 각론 반대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막을 수 있다. 그뿐 아니다. 더 나아가야 한다. 기업들도 규제가 풀리는데 따라 일자리를 만들고 투자를 더 하는 ‘맞불’을 놔줘야 한다. 그래야 규제개혁의 불길이 국민적 지지를 받는 ‘불(火) 폭풍(fire storm)’이 될 수 있다.

이번에는 규제개혁의 불길이 우리 경제를 숨 막히게 해왔던 규제의 벌판을 확 태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불길 속에서도 꼭 보존시켜야 할 ‘착한 규제’도 있다는 균형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규제가 왜 생기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냉정한 분석도 필요하다. 예를 들면 규제는 사건과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응책을 만들면서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정부가 정책으로 풀어야 할 부분과 기업이나 개인이 책임질 부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있어야 ‘좋은 의도하에서 생겨나는 나쁜 규제’를 막을 수 있다.

‘요원의 불길’이란 표현을 40년 전 입행시험 작문과목에서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규제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지금 쓰기에 오히려 딱 맞는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이번처럼 규제개혁의 불길이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등에 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붙은 불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도록, 그래서 나쁜 규제를 다 태우도록 모두가 힘을 모을 때다.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과 예산실장, 대통령 경제금융비서관을 지냈다. 상고 졸업 후 은행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행정·입법고시에 합격했다. 미국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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