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세위주의 갑근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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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근로 소득자들이 느끼는 갑근세의 중압감은 최근 2, 3년 동안 부쩍 심해지고 있다. 이는 주로 명목적인 급여상승을 훨씬 앞지르는 물가 상승과 대폭적인 증세의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지난해 중 제조업체 근로자의 실질임금이 17.4%나 줄었다는 한은 통계가 이것을 실증한다. 불황 속에서도 모든 다른 지표는 늘어났는데 유독 근로자들의 실질소득만 줄어든 것이다. 이런 사회적 불공평이 생긴 것은 현행 소득세법이 잘못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가가 아무리 올라도, 또 실질소득이야 어찌되든 간에, 규정된 세율대로 거두기만 하면 된다는 징세 위주의 세정이 이런 불합리의 근원이다.
따라서 뒤늦게나마 여당 쪽에서 이런 불합리와 불공평을 시정할 움직임을 보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다. 다만 근로자들은 여당 쪽의 이런 움직임이 지난해의 경우처럼 겨우 생색을 내는데 그치는 미미한 혜택이 아니라, 실질적인 부담경감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행 소득세율을 과감히 낮추고 각종 공제의 폭을 넓히는 대폭적인 손질이 불가피하다. 누구보다도 갑근세의 과중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부는 항상 세수확보의 차질을 이유로 난색을 보여왔다.
그러나 지난해의 징수 실적이나 올해의 전망으로 보면 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지난해만 해도 갑근세의 당초목표는 3백억원이 못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2·6배가 넘는 7백 66억 원이나 걷혔다. 이 숫자는 서둘러 짠 추경의 목표조차도 초과한 것이다.
이런 사정은 올해도 마찬가지다. 목표는 8백억원으로 잡고 있지만 「인플레」가 지속된다면 올해도 초과징수는 명백하다. 달마다 공표하던 갑근세 징수실적의 발표를 올 들어 중단한 내막이 이런데 있지나 않은지 궁금하다.
실제로 3월까지의 재정흑자가 이미 9백억원에 가까워 졌고, 물가 상승을 감안하면 연말까지 무려 2천억원의 세수 자연증가가 예상된다고 한다. 간단한 계산으로 현행 갑근세를 절반으로 줄인다해도 그로 인한 4백억 원의 세수감소는 총 조세는 물론 자연증가 분에 비교해도 미미한 액수다. 때문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세율자체를 대폭 내리는 일이다.
더욱이 현행세율은 이미 3년 전의 임금수준과 경제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소득계층의 개념이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세율자체의 대폭인하와 함께 누진율도 크게 완화하여 달라진 저소득·중간소득 계층의 혜택을 넓히는 작업이 필요하다.
기초공제액을 늘리는 것도 실질 생계비를 충분히 고려하여 공제의 본뜻이 살려져야한다. 때문에 5인 가족 9만원선의 공제로는 불충분하다. 실질급여와 마찬가지인 상여금에 대해서도 현실성 있는 공제확대가 바람직하다. 특히 지적해야할 것은 기초공제에 의료비와 교육비의 공제를 포함시키는 일이 매우 긴요하다는 점이다. 근로자 생계비의 주요비목이 이들 항목의 지출인 점을 고려하여 우선 이 두 항목의 공제만이라도 단계적으로 도입하도록 촉구하고 싶다.
2천억원의 자연증세추계가 정확하다면 정부는 추경부터 서둘러 돈 쓸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국민의 부담과 불편을 가능한 한 빨리, 먼저 덜어주고 난 뒤에 긴요한 용처를 찾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정부·여당의 과감한 결단과 성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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