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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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는 선뜻 판단하기가 곤혹스럽다. 이른바 이념 논쟁이 더 이상 많은 이의 눈과 귀를 잡아두지 못하는 요즘, 계급이 소멸된 이상 사회를 꿈꾸는 한 테러리스트의 비극적 종말이 과연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끌어낼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독일 사회가 배경인 이 영화는 오히려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분단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 엄연한 우리 현실 아닌가.

'레전드 오브 리타'는 연초 개봉됐던 한석규 주연의 '이중간첩'과 일면 통하는 구석이 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버림받았던 사회주의자의 최후를 그린 '이중간첩'과 비슷하게 '레전드 오브 리타'는 동.서독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던 여성 테러리스트의 삶을 따라간다. 천근만근 같은 이념의 무게에 눌려 결국 힘없이 쓰러지는 한 개인의 초상을 다룬다는 것도 엇비슷하다.

하지만 두 영화는 색깔이 다르다. 북한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했던 림병호(한석규)와 달리 '레전드 오브 리타'의 주인공 리타(비비아나 베글라우)는 좌.우 이데올로기를 모두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닮았다. 그래서 일면 순수.순진한 반면 그 표출 방식은 과격.단순하다.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리타는 영화에서 세 개의 얼굴을 갖고 등장한다. 이상사회 실현을 위해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은행강도.폭탄테러를 감행하는 리타는 시작에 불과하다.

서독에서 쫓기는 처지에 몰린 그는 동독 비밀요원의 도움을 받아 동독에 정착해 날염공장의 평범한 직공 수잔나로 변신한다. 그러다 그의 정체가 동료들에게 발각되자 이번엔 어린이 여름캠프 교사 사비나로 탈바꿈한다.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건 보다 나은 사회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다. 하지만 외부 환경은 그에게 가혹할 뿐이다. 노동자의 천국을 표방했던 동독도 그녀의 이상과 거리가 멀기는 마찬가지다.

리타는 동독에서 날염공장 동료 여성과 동성애적 유대 관계를 맺다가 여름캠프의 물리학도 출신의 남성 교사와도 열정을 불태운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에 불과할 뿐이다. 테러리스트의 낙인이 찍힌 그가 안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

영화는 리타의 '3색 사랑'을 가운데에 놓고, 그를 둘러싼 동.서독의 정세를 겹쳐놓으며 개인과 체제의 관계를 실감나게 풀어간다. 초반은 다소 지루하게 비치나 동독 은둔 생활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중반 이후는 제법 긴장감이 있다.

성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어른 아이'의 얘기인 '양철북'으로 197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폴커 쉴뢴도르프 감독이 연출했다.

제목의 레전드는 신분 조작을 뜻하는 독일 비밀경찰 용어. 2000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유럽영화상을 받았다. 다음달 2일 서울 광화문 시네큐브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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