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3)해외유학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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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26년 2월하순의 일본신문은 주먹만한 활자로 한 기이한 재판사건을 대서특필하였다. 사모관대를한 한국 남성과 한국 치마 저고리를 입은 일본여성의 사진이 실린 신문의 내용은 한층 기상천외하고 놀라운 것이라 신문을 읽는 독자는 일본인이거나 한국인이거나를 막론하고 경악의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박열씨 사건이었으니 물론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속속들이는 모르고 신문에 보도된 것만을 사실로서 받아들였다. 우리 한국인들로서 볼때 이 사건은 안중근의사의 의거에 겨눌만한 큰 사건이었다.
그때 박열씨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하였다. 정부를 부인하는 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가 어떻게다른 것인지 비교적 단순한 생활을 하던 학생인 나로서는 얼떨떨하고 그 방면에 대하여 지식이 없었더고로 구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공산주의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똑같이 분배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상이고 부정부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 절대적이라는 논조로서 인간이 최상의 선에 귀착하면 어느 누구가 다른 누구를 지배하거나 지배당할 수가 없다는 다분히 이상적인 요소가 강한 주의라고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정부는 필요없고 오직 국민이 있을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순수한 민족주의자건 공산주의자건, 혹은 무정부주의자건 모두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우리 민족에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에 항거하는 반일정신에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었다고 하겠다. 일본은 소위 명치유신이래 대정, 소화15년까지가 그 전성시대라고 하겠는데 당시의 일본은 천황지상주의의 극에 이르러 천황은 곧 신이 되던 시기었다. 이러한 때 천황과 황태자에케 폭탄을 투척하려한 소위 「대역죄」를 범한 박열씨의 사건은 그가 무슨주의자건, 또 어떤사상을 가졌건간에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전체의 항거와 갈망과 통분을 대변한 것이 되었었다. 천황을 신격화하는 일본인들은 『이는 불경이다』라고 떠들어대었다..
박열씨가 검거된 것은 l923년 9월 전율의 관동대지진 직후였다. 그러니까 대심원특별형사부에서 첫공판이 열리기까지는 장장 2년반이나 걸렸던 것이었다.
관동대지진은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하는 천재지변이었다.
도심지 신전, 본향등은 삽시간에 무너져 불타 없어져 버리고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낸 지진이었다. 내가 동경에 간 것은 이 지진후 1년8개월여만이었는데 신전역에서 5백m 떨어져 있는 동경여고교사의 건물이 「바라크」였다. 나는 당시 일본에서 제일이라는 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여 학교 교사에 별로 신경을 안썼지만 교사가「바라크」였던 것은 대지진에 교사가 파괴된 까닭이었던게다.
이러한 하늘의 노여움을 산천재지변에 대하여 일본인들은 실로 엉뚱하게도 한국인에게 못된 누명을 씌웠으니, 즉 「부령선인」들이 지진을 이용하여 방학·폭동을 일으키며 부녀자를 강간하고 생수에 독약을 넣는다는등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곧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자율단이 조직되어 통행인 검문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은 살기가 등등하여 죽창·엽총·일본칼(도)·곡괭이·쇠망치·막대기끝에 단도를 매단것등의 무기를 휴대하고 한국인들들 붙들어 학살하였으니 그 참상과 잔혹함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렇게 한국인들을 마구 잡아들이는중에 보호검속의 명목으로 박열씨와 그의 일본인애인 김자문자가 체포된 것이다. 박열씨와 김자문자는 「테로리스트」라기보다 그들의 철학에 입각하여 일본천황이나 황태자에게 폭탄을 던질 계획이었었다. 그리고 이사건은 실현되지못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물적증거가없고 오직 당사자들과 증인들의 진술에 의한 것이었었다. 1923년9월3일에 보호검속으로 체포되어 치안경찰법의범·비밀결사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드디어 대역죄로까지 확대되었던것이다.
특기할것은 박열씨나 김자문자, 그리고 멀리 서울에서 증인으로 소환된 기생 이소홍의 법정투쟁 태도의 훌륭함이었다. 박열씨는 일본천황과 황태자를 목표로 폭탄을 투척하려한 까닭을
ⓛ일본 민중에 대하여 일본황실의 진가를 알리고 그 신성을 땅에 떨어뜨리기 위하여
②조선 민중에대하여 일본황실을 무너뜨려 조선민중의 독립투쟁에대한 열정 고취를 위하여
③침체하고 있는 일본사회운동가에 대하여 혁명적 기운을 촉구하기 위하여라고 밝혔다.
또 김자문자는 혹 박열씨만 사형을 받고 혼자 살아남게 될까 저어하여 자기가 모든 사건의 공모자임을 항시 강조하였었다.
기생 소홍은 폭탄운반 과정의 연락을 맡았었는데 너무나도 의연하고 총명한 증언으로 재판관을 놀라게 하였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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