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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외국유학시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내가 일본에 가서 절실히 느낀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천혜의 금수강산인가 하는 것이다.
맑고 투명한 한국의 공기를 숨쉬고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살던 나에게 일본은 실로 우중층하고 숩기가 찬 나라였다. 흐리고 무덥고, 비가 내려도 속시원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받기도 뭣하고 안받기도 곤란한 부슬비가 몸으로 스며들어 몸이 끈적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울의 최하 온도는 영하 2도(C)정도이니 결코 강한 추위라고는 할 수 없을만한데도 그 추위는 몸속으로 으스스하게 스며드는 고약한 추위였다.
한국에서는 비가 와도 시원스럽게 줄기져 내리고는 막 그치고, 모 겨울 추위도 서울지방에서는 영하 15도를 상회할적도 많지만, 그것은 일본의기후에 비하여 얼마나 상쾌한 느낌을 주는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악조건의 기후 속에서는 자주 목욕을 하지 않고는 불쾌하여 견딜 수도 없을뿐더러 특히 겨울에는 목욕탕에 들어가서야 언몸을 녹일수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인들이 목욕을 즐기는 것은 그들의 위생관념이 철저해서라기보다는 기후와 풍토관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세탁을 하는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자랄때만 하여도 한국에서는 휜옷들을 많이 입었는데 우리네 여인들은 그 흰옷들을 눈같이 삶아 헹구고 바래어서 입었었다.
일본에 가서 잘 살펴보니 사람들이 모두 무색옷, 그중에도 검은색 옷을 많이 입었는데 세탁을 할 때 아직 더러운 물이 빠지는데도 그냥 헹궈 너는것을 보고 일본사람은 늘 깨끗한 즐만 알았던 나는 아연할 수 밖에 없었다.
3학년이 되었을때 나는 기숙사에서 나와서 이숙진선생과 함께 자취생활을 하였다. 다소익숙해졌다고는 하여도 기후와 음식이 안맞아 고생을 하다가 입에 맞는 한국음식을 만들어먹게 되니 우선 살것같았다.
이때 우리가 자주 사먹었던 음식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것은 「교오나」(경수)라고 하는 나물이었다. 잎이 늘어지고 헝클어져서 쑥대머리 같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나물을 먹을때마다 우스갯소리를 나누었다.
이때 주로 요리하고 안 살림을 하는 것을 내가 맡았고, 이숙종선생은 장보기라든가 바깥 심부름을 도맡아 하셨고 가끔은 설겆이도 도왔다.
해방 후 미국에서 김활난씨와 이정애씨가 함께 계셨는데 한번은 이정애씨가 이숙쟁선생께 미역을 좀 빨아달라고 하셨다. 이숙종선생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열심히 미역을 빨았는데 거기 불은 모래를 없앤다고 어찌나 주물렀던지 나중에 보니 고갱이만 남았더라는 이야기다.
그래서『당신은 쓰레기 버리는 아범 노릇이나 해야지 미역을 빨리면 안되겠다』고 하여 한바탕 크게 웃었다는 것이다.
이런 분이니, 일본에서드 필경 이분은 바깥심부름이나 하셨는데 한번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들고 오다가 길에서 교수님을 만나는 바람에 너무나 당황하여 그만 얼결에 길가의 남의 집으로 뛰어들어 그집 사람들에게서 『웬 미친 사람이 침입하었느냐』는 호롱을 받으신 적도 있었다. 지금은 시장에서 물건 사는것도 예사로운 일, 또 길에서 교수님을 만났으면인사를 하는것도 예사로운 일이련만 이런 일들이 모두 부끄러운 일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니 다시 한번 격세지감을 금할수 없다.
나중에 우리 자취생활에는 또 한분이 참여하였는데 이분은 김명자(김석원장군 매씨)로 후에우리 둘째 오라버니와 혼인하여 우리 들째 올케가 되신 분이다.
또 하나 동경여고사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은 당시의 일본은 이른바 「명치유신」의 여세를 몰아 모든것을 서구식으르 개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래적 고유한 문화와 주체성위에 새로이 서구적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심지어 사교춤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고 서구풍의 양장과 「코티」분 따위까지가 다들어왔다. 그래서 나도 학교 체육시간과 무용시간에 사교춤을 배웠었다. 미술전람회가 여기 저기서 열리고 음악회가 자주 얼려서 나는 집에서 부쳐오는 25원중 기숙사비 17원을 제한 나머지 돈으로 자주 음악회에 갔었다. 한번은 「이탈리아」가극이 국제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특등석은 3원이었고 3층은 1원50전이었다.
나는 3층 꼭대기자리에 앉아 이 가극을 관람하였는데 관객과 무대가 혼연일체가 되어 열에 들뜬 분위기였다. 뿐만아니라 「우에노」 음악학교 강당에서는 외국 「오페라」 단이나 「심퍼니」 단이 와서 자주 연주하였는데 열중하는 관객과 땀을 홀리며 지휘하는 지휘자를 볼적마다 학생인 나에게는 대단히 감격스러웠다. 이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압정하에서 신음하며 어두운 역사룰 더듬고 있었는데 일본은 벌써 이렇게 세계의 문화와 문명에 접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는가룰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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