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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사태와 오바마의 아시아 순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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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세월이 흐르면 사랑은 식기 마련이다.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항변은 존경의 마음으로 기꺼이 접수하겠다) 시간은 열정의 자리를 권태에게 내준다. 실망은 짜증으로 변하고, 짜증은 무관심을 낳는다. 그럴수록 관계는 더 멀어진다. 지난 세기에 걸쳐 죽고 못 살 것 같았던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금세기 들어 그렇게 점점 멀어졌다. 소 닭 보듯 데면데면해진 미·유럽 관계가 최근 들어 다시 가까워지는 모양새다. 크림반도 사태가 발단이 됐다. 나이 든 부부가 불시에 닥친 위기 앞에서 다시 손을 잡는 모습이라고 할까.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 맞춰 기획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유럽 순방은 유럽에 대한 미국의 애정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이탈리아로 이어진 그의 여정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위협 앞에서 미·유럽의 결속과 대서양 동맹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3월 29일자)는 “푸틴은 크림반도를 합병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미국이란 화성과 유럽이란 금성에 큐피드의 화살을 쏜 꼴이 됐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유럽의 식었던 사랑이 정말 되살아나는 것일까.

 소원해진 관계가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면 공동의 도전을 물리칠 의지와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부부가 힘을 합쳐 파산 위기를 극복하면서 관계가 회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과연 미국과 유럽은 푸틴의 도발적 공세를 제압할 힘을 갖추고 있는가. 또 그럴 의지는 있는가. 불행히도 둘 다 아닌 것 같다. 오바마가 헤이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웃을 위협하는 러시아는 (세계 강국이 아닌) ‘지역 강국’일 뿐”이며 “이는 힘의 발로가 아니라 연약함 때문”이라고 독설을 퍼부은 것은 푸틴의 공세에 대해 미국이 느끼는 무력감의 표현 아닐까.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전력(戰力)은 과거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다. 냉전 시기 최대 40만 명에 달했던 유럽 주둔 미 지상군 규모는 6만7000명으로 축소됐다. 1991년 냉전 종식 당시 800대에 달했던 유럽 내 미 공군기 수는 170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4만 명 규모였던 유럽 내 미 해군과 해병대 병력도 7000명 선으로 줄었다. 종합적으로 보아 냉전 종식 당시의 15% 수준으로 유럽 내 미 전력은 축소됐다.

 미군이 빠진 자리를 유럽이 대신해야 하지만 재정위기로 유럽은 제 코가 석 자다.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을 방위비로 쓰기로 했지만 28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 중 약속을 지킨 나라는 미국을 포함해 손꼽을 정도다.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은 GDP의 1.6%를 방위비로 썼을 뿐이다. 미 행정부 고위 관리가 “러시아군이 동부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어도 나토 병력이 키예프로 진격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미리 선을 그은 것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월 하순 아시아 순방길에 오르는 오바마의 머리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무력으로 유럽 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사태는 없을 것으로 믿고,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했지만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으로 그 판단은 잘못임이 드러났다. 몸은 한국과 일본,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으로 향하지만 그의 마음은 계속 유럽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유럽으로의 재회귀(Repivot to Europe)’를 선언할 형편도 아니다. 그럴 자원이 미국에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 입장에서는 푸틴을 자극하지 않음으로써 우크라이나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유럽에서의 실수를 아시아에서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 동맹국들이 지금의 유럽처럼 ‘종이호랑이’가 되지 않도록 다독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미·일 공조가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한국과 일본의 화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헤이그에서 오바마가 한·일 정상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과 미사일방어(MD) 체제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은 한국과 일본을 대중(對中) 견제의 보루로 삼겠다는 의도를 명확히 한 것이다. 러시아의 무력 앞에 무기력한 유럽의 모습을 아시아에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크림반도 사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을 미국과 유럽이 간과한 데서 비롯됐다. 같은 실수를 아시아에서 반복하지 않으려면 한·미·일 공조에 목을 매기보다 중국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지정학적 마지노선이 어디인가를 파악하는 게 더 효과적일지 모른다. 그것은 대만이나 북한일 수도 있고, 동중국해나 남중국해일 수 있다. 티베트나 신장위구르일 수도 있다. 이달 말 아시아에 오는 오바마가 깊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