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년전의 감격 지금도 못잊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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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누르면 누르는대로 묵묵히 참으며 살아오던 백성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압제자에게 반항의 맨주먹을 휘둘렀던 그날-. 필생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읍니다.』
「3·1운동」 당시 경성여고보(현경기여고생 가두시위를 주동했던 김숙자여사(83)는 57년만에 그때의 흥분과 감격을 털어 놓았다.
관립학교였던 경성여고보학생들의 자주독립만세시위행진은 당시 장안에 큰 파문과 충격을 던져주었다.
3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여사는 25세의 만학처녀.
의협심이 강하고「리더쉽」이 뛰어나 학생들은 김여사를 「언니」로 불렀다.
1919년이 밝아오면서 김여사는 민족대표33인중 한사람인 박희도씨와 극비리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서울종로구경운동에 위치한 기숙사에서 동료기숙사생 60여명을 중앙교회에 데리고나가 윤치호선생의 주일성경을 들었다.
윤선생은 「윌슨」미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상기시키며 학생들의 결속을 호소했다.
학교당국은 이때부터 학생들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특히 기숙사학생들의 동태에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인 사람은 「쓰즈꾸」사감.
방과후 외출이 철저히 통제되었다. 김여사는 기숙사복습실에서 한국지도를 펼쳐놓고 동료들에게 조국의 참모습을 일깨웠다. 취침시간에 살며시 일어나 태극기를 그렸다.
그해 2윌 세째 일요일. 『병원에 간다』며 기숙사를 빠져나간 김여사는 박희도씨를 만나 『3월l일 오후1시까지 파고다공원으로 나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기미년 3월1일. 설레는 마음과 충혈된 눈으로 밤을 새운 김여사의 손에는 손수그린 3백여장의 태극기가 꼭 쥐어져 있었다.
상오11시쯤 기숙사 담너머로 독립선언서 2백여장이 날아왔다. 김여사와 최은희 이선경 이덕순 최정숙씨등은「잉크」가 채마르지않은 독립선언서를 쥐어들고 선생들의 눈을피해 학장실로 달려가 읽고 또 읽었다.
『나가자. 파고다 공원으로』-. 김여사의 절규와 함께 기숙사생 60여명은 석탄을 들이기 위해 열려진 뒷문으로 쏜살같이내달았다.
검정치마저고리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종로2가∼시청앞광장∼서대문을 누비며 서울역을 한바퀴돌았다.
『여학생은 우리들 뿐이었어요. 기겁한 선생들이 시위를 막기위해 뒤쫓아나왔지요.』 김여사는 두주먹을 불끈쥐고 그때의 상황을 더듬었다.
3월10임 조선총독부의 임시휴교령과 함께 김여사는 고향인 평북영변으로 내려갔다. 숭덕여고 사감을 지내면서 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에 가입,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사학가 장도빈씨(사망)와 결혼, 슬하에 장치혁씨(45·고려합섬대표)등 4남을둔 김여사는 현재서울마포구 서교동 485의85 맏아들 장치영씨(56·한국지질공업 감사)집에서 노환으로 몸져누워있다.『요즘 여학생들은 조국관이 너무 희박한것 같아요. 그때 그감격은 사라지고 이제 아무도 흥분하려들지 않는군요. 젊은이들만 탓할수는 없지요.』 김여사는 교육을통해 피맺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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