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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을 주더라도 두 손으로 퍼주는 사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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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호 26면

저자: 홍쌍리·김도혜 출판사: 알마 가격: 1만6500원

이 책을 읽고 나서 문득 광양국제매화문화축제에 가고 싶어졌다. 날짜를 찾아 보니 올해는 22일부터 30일까지다. 매화꽃대궐을 보러 100만 명이 몰린다는 행사다. 그 축제의 중심에 청매실농원이 있고, 올해는 ‘매실 농사꾼’ 홍쌍리(71)씨가 농원을 시작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인생은 파도가 쳐야 재밌제이』

그를 그저 농사꾼이라고 부르기엔 많이 아쉽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는 남다른 지식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 역경을 기회로 삼고 마는 전문가를 ‘브리콜레르(Bricoleur)’라고 일컬었는데, 내가 보기엔 그녀가 바로 브리콜레르다.

어릴 적부터 노래 잘하고 글쓰기 좋아했던 그녀를 밀양의 만석꾼 아버지는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공부를 시키면 큰일이 난다”는 작명쟁이의 말 때문이었다. 대신 열여섯에 부산 동생집으로 보내 장사를 돕게 했다. 이때 그녀의 장사하는 마음 씀씀이를 보고 며느릿감으로 점 찍은 광양 밤 장수가 있었으니 이후 광양의 첩첩산중에서 스물둘 새색시의 시집살이는 시작된다.

45만 평에 달하는 농원일 건사부터 일꾼 식사 준비, 모진 시어머니와 병약한 남편, 세 아이 수발까지 모두 그의 일이었다. 시아버지와 남편의 광산 사업 실패로 증폭된 고난의 가시밭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일일이 적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황이 힘들수록 그녀의 브리콜레르적 기질은 빛을 발했다. 우선 남다름. 시아버지 덕분에 매실의 약효를 알고 나서 매일 먹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장아찌를 만들기로 했다. 거듭되는 실패 끝에 시아버지가 아끼던 설탕을 몰래 집어넣고 기어이 완성시켰다.

둘째는 추진력. 시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무릅쓰고 밤나무와 대나무를 베고 매화나무를 하나 둘 심어 숲으로 만들었다. 몸으로 느낀 매실의 효능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위 사람들도 인정한 매실농축액을 정식으로 팔기 위해 그는 군청의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전례가 없어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공무원들 말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렵사리 만나 그의 얘기를 들은 젊은 군수가 해당 공무원들에게 “그걸 만들어내는 게 여러분 일 아닙니까?”라고 호통치는 대목에 이르면 속이 다 후련해진다.

하지만 이 정도 성공스토리라면 브리콜레르라는 수식어를 아직 붙이기 어렵다. 그녀가 진짜 빛나는 이유는 나눔과 베풂의 정신에 있다. 부산에서 밤 장사를 할 때도 덤을 두 손으로 퍼주던 그녀다. 추운 데서 고생하던 장사꾼들 앞에서 저울은 무용지물이었다. 반찬 하나를 해도 좋은 재료만 골라 넉넉히 만들었다. 약초를 캐 끼니를 이어가던 부녀가 집 앞을 지나가면 주먹밥을 만들어 망태에 슬쩍 넣어주곤 했다.

지금도 초겨울이면 월요일마다 동네 할머니들을 모시고 목욕을 간다. 등 밀어 드리고 우동 한 그릇씩 사드리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런 그에게 ‘큰 동네 아지매’는 이렇게 말한다. “수야네야, 니 각시 시절에는 참말로 예뻤는데 니년도 우리 같이 늙어가네? 니년은 늙지 말고 아프지도 말고 죽지 마라.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사람 다 쳐다보고 도와줄라 카면 아프고 죽으면 안 된다. 우야든동 건강하거라. 동네 할망구들은 해줄 것도 없고 니년 건강만 빌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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