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추악한 「빌딩」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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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893년「시카고」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린 적이 있다. 건축가「올름스테드」와 「번햅」이 설계한 회장건물은 그 당시 비좁고 더럽고 우중충하기 짝이 없던 「시카고」시와 같은 기존대도시 건축물에 강렬한 자극을 던져주어 그 것을 계기로 그 유명한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운동이 폭넓게 전개되었다.
아름다운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시민의 생활환경에 「미」를 도입하여 도시민에게 쾌적, 편리하고, 건전한 생활의 터전을 갖게 하자는 것이다.
서울시 당국이 문화재 보호지역과 도심권 건물옥상의 광고물을 철거·정비하기로 한 것도 이를테면『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의 수법을 따르려는 하나의 시도라 하겠다.
어느 나라든 산업화의 여파는 대도시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어서 과밀화·대형화·무질서를 초래하기가 쉽다. 게다가 철골·유리·「콘크리트」가 현대건축의 뼈대와 살을 이루게 된 추세아래서는 건물의 생김새마저 잘못하다간 살벌하고 위압적인 괴물이 되기 일수다.
하기야 철골·유리·「콘크리트」·광고판, 그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고층「빌딩」자체를 가지고 짜증을 낼 수는 없을지 모른다.
문제는 그러한 공간구성과 건조물이 기능적으로 견고하고 편리할 뿐 아니라 외모상으로도 아름답고 우아해야만 하는 이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느냐에 있다. 하물며 그러한「빌딩」들이 주민이나 행인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위험을 주거나 혐오감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 대도시의 시가지를 걷다보면 도대체 저것도 인간을 수용하기 위한 건물일까 싶을 정도의 불쾌감을 던져주는 건조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중충한 회색의 벽면을 「시멘트」벽돌로 쌓아 올려 마무리 손질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는가 하면 그 중간 중간엔 녹슨 철근들이 비죽비죽 돋아난 추한 모습을 볼 때는 꼭 무슨 괴물의 현상을 보는 듯 메스꺼움을 느끼는 것이다.
또 어떤 건물은 대로에 면한 앞부분만은 요만한 광고판으로 눈가림을 했으나 옆이나 뒤를 보면 흉악하기 이를데 없는 것들도 더러 있다.
문화재 보호지역에서 가장 몰골 사나운 것은 철자도 맞지 않은 엉터리 외국어상품명을 대문짝 만하게 그려 붙인 광고판이다. 어디 그 뿐이랴, 「빌딩」옥상마다 즐비하게 솟아 있는 상당수의 초대형 광고판엔 영어인지 독일어인지「프랑스」말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알송달송한 합성어들이 제멋대로 나붙어 있지 않은가.
세계 속의 「메걸로폴리스」로 성장한 수도 서울의 얼굴도 이제는 보다 아름답고 보다 깨끗하게 재구성되어야만 하겠다. 이 것은 결코 사치가 아닌 것이다.
도시의 얼굴엔 표현이 있으며 그 표현이 아름다움과 화음을 주느냐, 아니면 추악과 불협화음을 느끼게 하느냐에 따라 시민들은 서로 훈훈한 연대감을 나눌 수도, 또 반대로 차가운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도시의 기능과 시각적 표상의 조화란 이 처럼 시민의 생활공간과 시민의 마음사이의 거리를 좁히는데도 큰 몫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파리」를 비롯한 서구의 몇몇 도시 당국과 화가들은 즐겨 큰 건조물 뒷면을 아름다운 벽화나「디자인」으로 장식하는 풍경이 늘어간다고도 한다.
튕겨나온 철골의 녹물로 더럽혀진 우중충한「콘크리트」벽면을 바라 볼 때마다 우리도 「빌딩」의 준공검사를 내줌에 있어서는 사전에 미관위 같은 기구의 심사를 거치게 하여 도시건물로서의 미적 필수요건을 반드시 건물주에 요구해야할 것으로 믿는다. 가장 기능적으로 우수한 건조물이란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외관을 갖는 법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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