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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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화창한 날씨다.
한기 속에서도 춘의는 감출 수 없다. 마당의 산당화는 어느새 새 눈이 통통하게 부풀어 있다. 목련의 꽃자리도 솜털에 윤이 난다.
시후를 잊지 않고 계절만은 여전하다. 옛글에 보면 겨울은 다른 삼계의 휴지기다. 말하자면 계절의 변천에 「커머」하나를 찍고 잠시 쉬는 시기인 셈이다. 따라서 봄은 천의가 자연에 순응하는 계절이라고 했다. 다른 계절들이 서사시라면 봄은 사뭇 서정시의 경지다.
우리의 생활도 계절의 변환처럼 좀「리드미컬」했으면 좋겠다. 사람에겐 추상같은 자세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천의가 자연에 순응하듯 춘기의 「리듬」도 가져 봄직하다.
옛사람들도 『마음은 가을의 정신으로, 행동은 봄의 정신으로 하라』고 가르쳤었다.
화신은 아직도 지평선 저쪽에 머물러 있지만 우수가 지나면 서서히 발길을 떼기 시작한다.
기온이 영상5도에 이르면 수목들도 심호흡을 한다. 수액이 오르고 생기를 찾는 것이다.
관상대의 기록을 보면 2월 중순께부터 화신은 하루 20㎞의 속도로 북상한다.
제주도의 경우 어느새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금방 그 뒤를 따르는 매화전선은 3주정도면 부산에 상륙, 줄달음을 친다. 서울까지는 한달 남짓하지만 한반도는 이제 화신권에 접어든 셈이다.
매화의 뒤를 쫓는 화신은 개나리, 한 달쯤의 시차를 두고 물들이기 시작한다. 개나리의 전선이 지나가면 그 뒤엔 갖가지 꽃들이 앞을 다투어 따라간다. 진달래·벚꽃이 숨이 차서 달음박질을 쳐온다. 이런 꽃 전선의 상공에는 제비들이 날고 있다. 봄은 이 처럼 무르익는 것이다.
중국의 어느 문인은 꽃과 달과, 미인이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생각은 아예 하고 싶지도 않다고 노래한 일이 있었다. 순정파치고는 좀 지나친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면 지나친 감상만도 아닐 것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도 봄이 오지 않는다는 생각은 상상만 해도 삭막하다. 몸도·마음도 함께 추워진다.
봄의 새들이 파랑파랑 하늘을 나(비)는 생명감, 꽃들이 자유분방하게 피어나는 정감마저 느낄 수 없는 일상이라면 실로 우리의 고달픔은 어디서 위로를 받겠는가.
오늘은 우수. 그런 봄은 이제부터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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