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6000바퀴 달린 KTX … 국민 1명당 여덟 번 탄 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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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지역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윤미희(29·여)씨는 자칭 ‘연극 매니어’다. 수시로 공연정보사이트에 접속해 볼 만한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 등이 있는지 살핀다. 이따금씩 오전 8시쯤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KTX에 몸을 싣는다. 오로지 연극을 보기 위해서다. 부산에도 남포동과 광안리 등지에 크고 작은 공연장이 있지만 다양성은 서울 대학로를 따라가지 못한다. 윤씨는 “두 달에 한 번쯤 아침에 부산에서 출발해 서울에서 친구와 연극을 보고 차도 마시고 저녁에 돌아온다”고 말했다. 그는 KTX가 만들어낸 ‘원정 공연 관람객’이었다.

 # “손 대리, 이번 토요일에 점심 약속 있어요? 시간 되면 밥 한 끼 할까요?”

 대구의 의료기기업체 영업 담당인 손명국(31·의료기기 영업사원) 대리의 스마트폰 화면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떴다. 발신자는 서울 중구의 거래처 직원. 손 대리는 잠시 스케줄러를 뒤적였다. 그날 저녁에 울산에서 고교 동창들과 모처럼 저녁을 먹기로 한 터였다. 대구에서 아침을 먹고 서울에서 점심을, 울산에서는 저녁을 먹어야하는 상황. 이동거리는 680㎞다. 그래도 가능하다. 손 대리는 “12시30분쯤에 뵙죠”라고 답하고는 바로 스마트폰으로 KTX표를 끊었다. 그는 “영업 때문에 이리저리 뛰다 보니 하루 세 끼를 다른 도시에서 먹는 식으로 일정을 짜는 것 자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26일 부산역 KTX 승강장 모습. KTX로 인해 부산이 서울과 2시간30분대로 성큼 다가서면서 부산의 관광·전시 산업이 한층 발전했다. [송봉근 기자]

 다음 달 1일이면 KTX 운영 10주년이다. 그간 KTX는 지구 6000바퀴에 해당하는 2억4000만㎞를 달렸다. 하루 평균 15만 명씩 모두 4억1400만 명이 KTX를 이용했다. 국민 1명당 여덟 번 이상 KTX를 탄 것이다.

 최고 시속 350㎞로 달리는 열차는 국민 생활과 의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웬만큼 떨어진 도시는 이젠 예전에 시내 돌아다니듯 한다. 하루 한 번 서울~부산을 논스톱 운행하는 열차는 2시간17분 만에 승객을 서울 한복판에서 부산 도심으로 옮겨놓는다. 그러면서 ‘같은 생활권’이란 인식이 점점 강하게 자리 잡았다.

 물론 전에도 비행기가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아직도 비싸다. KTX처럼 ‘국민 운송 수단’으로 자리 잡기엔 좀 부족하다. 게다가 날씨가 수상하면 지연되기 일쑤다. 이에 비해 국내 KTX는 거의 정확히 정시 운행한다. 정시 운행률이 99.88%다. 그래서 ‘약속’이 생명인 비즈니스맨들은 주로 KTX를 이용한다.

 직장인들이 KTX를 선호하는 이유는 또 있다. 사실 비행기는 공항에서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타고 도심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KTX보다 빠르다. 이에 더해 직장인은 출장비를 회사에서 내어주는데도 대부분 비행기보다 KTX를 택한다. 기차 안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비행기와 달리 KTX 안에서는 노트북PC를 켤 수 있고, 객실과 객실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나가 휴대전화 통화도 할 수 있다. 시간과 데이터 용량이 제한돼 있지만 인터넷도 쓸 수 있다.

 박영봉(54) 부산은행 부행장은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비행기 대신 늘 KTX를 이용한다. 한 달 5~6차례 서울 출장 때마다 KTX에 오른다. 그는 “무엇보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노트북PC를 이용해 결재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KTX는 문화생활을 즐기는 대학생 등 20·30대 지방 젊은이들에게도 매력적인 이동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지방에 사는 이들에게 서울은 ‘놀거리’가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다. ‘홍대문화’로 불리는 인디밴드와 클럽, 대학로에 들어선 소극장처럼 감성을 자극하는 콘텐트가 풍부하다. 광화문 일대와 명동도 한 번쯤 들러보고 싶은 명소로 꼽힌다. KTX가 도입되면서 서울까지 2시간30분 만에 갈 수 있게 되자 20·30대들은 주저없이 서울행 티켓을 끊고 있다.

 반대 현상도 있다. KTX를 타고 지방 도시들을 찾는 이들이 확 늘었다. 이 때문에 KTX와 지방 ‘시티투어 버스’를 연계한 프로그램이 인기다. 붐을 이어가려고 부산관광공사는 서울~부산 KTX 탑승객들에게 부산시티투어 버스를 20% 할인해주고 있다. 이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부산역을 출발해 해운대와 태종대 등 부산의 명소를 둘러보는 2층 버스다. 부산관광공사 최부림 차장은 “지난해 시티투어 탑승객 24만 명 중 10만 명 정도가 KTX를 타고 온 승객”이라며 “특히 여름철에는 밤 열차로 내려와 밤새도록 해운대에서 놀고, 다음 날 아침 서울 등으로 돌아가는 20대도 상당수다. 10년 전에는 볼 수 없던 현상”이라고 말했다.

 KTX는 압도적인 장거리 이동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수도권과 부산을 오가는 승객 중 철도를 이용하는 비중은 KTX 개통 직전 38%에서 현재 69%로 거의 두 배가 됐다. 이런 부산행 열차 탑승객 대부분이 KTX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다.

 상대적으로 비행기 이용객은 줄었다. 서울 김포공항과 대구공항을 잇는 항공노선은 이용객이 사라지다시피 해 2007년 말 폐지됐다. 김포~부산, 김포~울산 항공편 이용객 또한 확 줄었다. 이로 인해 항공사뿐 아니라 공항마저 울상을 짓고 있다. 이용객이 많아야 공항 자체 수입이 늘 텐데, KTX 때문에 오히려 이용객이 줄었다. 한국공항공사 부산지사 신현구 차장은 “탑승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공항주차장 요금 할인, 항공사의 공항이용료 할인 같은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체적으로는 비행기 탑승객이 줄었지만, 저가항공사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다. 이들 역시 KTX보다 요금은 비싸다. 그래도 시간을 좀 아낄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그래서 굳이 이동 중에 업무를 보지 않아도 되는 직장인 등은 저가항공을 많이 이용한다. 2007년 설립된 에어부산과 2008년 진에어가 국내 노선에서 비교적 선전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현재 울산에서도 지역경제 단체를 중심으로 저가항공사인 가칭 ‘에어울산’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항공사들이 KTX에 밀리는 가운데서도 저가항공사가 재미를 보고 있다는 건 상대적으로 대형 항공사가 고전한다는 뜻이다. 이는 KTX 개통 전부터 예견됐던 바다. 이와 마찬가지로 KTX 운행 전에 모두들 얘기하던 걱정거리가 있었다. ‘빨대 효과’다. 예를 들면 부산 시민이 KTX를 타고 서울의 백화점·병원에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쇼핑과 의료는 대부분 지역 현지를 택했다. ‘서울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있지만, 그래도 KTX를 이용하는 주목적은 업무, 관광, 친지 방문(87%) 등이었다. 한국교통연구원 조사 결과다. KTX 이용 목적 중 ‘쇼핑’은 0.4%에 그쳤다.

순천향대 행정학과 양광식(48) 교수는 “오히려 KTX 덕에 역 일대에 상권이 활성화되고 지역 관광자원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다”며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양 교수는 “KTX가 더욱 활성화되려면 가족 단위 이용객에게 요금을 할인해 주는 등 다양한 요금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전국 41개 정차역과 연계한 교통수단도 세밀하게 구성해 역 접근성을 더욱 높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차상은 기자

1호 기장 황재경 “승객 옷차림만 봐도 어디 가는지 짐작”

10년 전인 2004년 4월 1일 오전 5시30분 서울역. 부산으로 가는 KTX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KTX가 운행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조종간을 잡은 이는 황재경(51·사진) 기장. 이후 그는 10년간 쭉 KTX를 몰았다. 황 기장은 “10년이 KTX 속도만큼 쏜살같이 지나갔다”며 “그동안 사고 없이 운행했다는 게 가장 큰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황 기장과의 일문일답.

 - KTX 10주년을 맞이하는 기분이 남다르겠다.

 “2004년 처음 출발할 때 느꼈던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KTX의 첫 기장이라는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랑거리다.”

 - 보람을 느낄 때는.

 “기관사들은 열차가 멈출 때의 충격에 무척 민감하다. 승객들이 정지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부드럽게 정차했을 때 희열을 느낀다. 10년쯤 운행하다 보니 정차 실력이 늘어난 것 같다. 전 좌석이 매진됐을 때도 기분이 좋다. 대신 안전 문제 때문에 긴장감은 두 배가 된다.”

 - 10년 전과 지금 달라진 점은.

 “초기에는 한 번에 100명 정도 태우고 출발했는데 지금은 350~400명 정도가 탄다. 그만큼 안전에 대한 책임감이 더 무거워졌다.”

 - 기장만의 특권은 없나.

 “열차의 맨 앞에 있다 보니 승객보다 먼저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다. 경남 밀양 원동역 일대에 만개한 매화, 경북 청도 화악산의 설경 등을 즐기는 재미가 있다. 물론 순식간에 지나가기는 한다. KTX는 워낙 빠르고 터널도 많아 새마을호 때만큼은 경치를 감상할 수 없다.”

 - 이동거리가 엄청나겠다.

 “10년 동안 70만㎞ 정도를 달렸다. 지구 17바퀴 반이다. 경험이 쌓이다 보니 승객들의 옷차림과 신발만 봐도 ‘저 승객은 무슨 일을 하겠구나, 어디까지 가겠구나’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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