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만개면 비친 달 그림자도 만개 체면 앞세워 허물 숨기면 불신만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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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절도죄를 범한 두 사돈이 감옥에서 만났다.
『사돈께서 웬일이십니까.』
『길을 가다가 새끼줄이 떨어져 있길래 썩혀 거름을 하려고 주워 가지고 갔더니 그 끝에 묶여있던 소가 끌려와 소도둑으로 몰렸읍니다』
『사돈께서는 어찌된 일이십니까.』이번엔 그 소도둑 사돈이 물었다. 『나는 남의 물건을 말 안하고 빌어 왔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점잖은 사돈간의 체면을 빗대어 도둑의 소행을 풍자한 얘기다.
사회부조리로 집약되는 요즈음의 어두운 세상을 볼 때 마다 이 이야기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갖가지 부정을 저지르고 쇠고랑까지 차도 깊은 자성의 반성보다는 옹색한 변명과 심지어는 최소한의 생존권을 위해서라는 주변 상황을 부끄럽지 않게(?) 앞세우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세상의 깨끗치 못한 일들은 흔히 본심의 거울에 비치는 자성의 뉘우침보다는 얽힌 회로들을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역설적인 변명들로 싸여 있는 것 같다.
나는 늘 이런 왜곡된 심상들을 접할 때마다 사람의 「마음씀」을 우선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자성의 반성이 없이는 모든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바로 나갈 수 없다. 모든 발전과 복도 자성의 반성을 통한 「바른 마음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불타·공자 등과 같은 성현 등도 결국은 남달리 자성을 반성한 사람들이다. 자성이란 자기의 고향이며 자기의 주인공인 마음의 주체다.
우리 불가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 나온 곳인 마음의 본체는 공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또 이 공은 대각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대각은 하도 커서 이 속에서의 공간은 바다의 한 거품과 같을 뿐이다.
대각의 경지에서 볼 때는 한 먼지 속에 자주가 들어 있고 우주 속에 한 먼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공을 초월한 대각의 경지에서는 멀고 가깝고, 크고 작은 것이 없는 것이다.
중생의 모든 고는 이같은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대각견성의 큰 이치를 쉽게 얘기한다면 올바른 「마음씀」을 위한 자기반성이다. 수만 경의 법도 모두가 자성을 살피기 위한 깨우침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갖가지로 쓰지만 그 본체는 하나인 것이다. 마치 달은 하나지만 강이 1만개 있으면 그에 비치는 달 그림자는 1만개가 되는 것과 같을 뿐이다.
따라서 국가는 하나지만 국민이 1억일 때는 1억개의 나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체로 돌아가면 하나뿐이기 때문에 1억 국민의 마음이 올바로 쓰일 때 국가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성의 깊은 반성은 남을 이끄는 지도자부터가 철저해야 한다. 특히 입지라는 특수한 포부를 가진 사람이면 더욱 절실하다.
한때 『외국농민들은 관에서 지도하는 대로 벼를 심는데 우리나라는 관의 지도를 전혀 외면하고 지도요원이 돌아서기만 하면 달리 심어버린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는 물론 농민들의 오랜 관습도 문제겠지만 지도자가 아직 무엇인가가 서투르기 때문에 불신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세태는 모든 발전과 모든 면이 자성 속에 있으므로 자성의 반성을 등지고는 어떤 발전도 얻을 수 없다는 불법의 진리가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한 것 같다. 【박영암 스님(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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