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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도 무대에…'산소같은' 연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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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것을 불을 일으키는 공기, 즉 파이어 에어(fire air)라고 명명했습니다."

"어허, 아니지요. 그건 플로지스톤(물체 속에 생명력이 있다는 개념)이 없는 공기잖아요. 그래서 나는 디플로지스톤이라고 불렀습니다."

"기존의 이론 갖고는 이 물질을 규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새롭게 이름을 지어봤습니다. 옥시즌(산소)입니다."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내 연습실. 배우들의 입에선 플로지스톤, 옥시즌 등 생경한 단어들이 튀어 나온다. 4월 3일부터 문예진흥원 소극장에 오르는 연극 '산소'는 특이하게도 산소()의 최초 발견자라는 타이틀을 두고 세명의 과학자가 벌이는 신경전을 소재로 했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골치 아픈 과학 얘기만 다룬 것은 아니다. 그 속엔 과학자들의 질투.집념.사랑.뒷거래 등 인간 삶의 축소판이 들어 있다. 일반 관객들은 그동안 몰랐던 과학자들의 삶에 대해 알고,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다. 덤으로 연극적 재미까지 있으니 일석삼조다.

이처럼 대학로 연극이 달라지고 있다.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과학이나 노사 문제 등으로 소재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또, 각종 기금 등에 의존하지 않고 떳떳하게 외부 자본을 들여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다양한 소재로 눈을 돌리다=올 들어 과학을 소재로 한 연극이 줄을 잇고 있다. '산소'에 이어 인간 복제 등 생물학적 관점을 다룬 '완전한 오해', 핵폭탄에 얽힌 이야기 '코펜하겐' 등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들은 과학 지식을 통해 인간과 철학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이들 연극이 정보를 제공하고 문제의 해결법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과거 새마을운동 시기에 선보인 정책극이나 요즘의 목적극(propaganda)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극들은 목적극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재미와 드라마적 요소를 함께 갖췄기 때문이다. 교육 연극 전문 극단 달팽이의 박주영 대표는 "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해 판단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기 때문에 연극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든든한 외부 자본이 들어온다=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보러 와요(5월 8일~6월 12일)'는 제작비가 2억원으로 책정됐다. 중극장용 연극의 제작비가 일반적으로 5천만원 전후인 데 비하면 넉넉한 금액이다. 이 연극을 영화(제목 '살인의 추억')로 만들어 5월 개봉하는 싸이더스 측이 제작비의 반을 부담했다.

'날보러 와요' 관계자는 "창작 지원금은 금액이 너무 적어서 작품을 제때에 제대로 올리기가 어려웠다"며 "외부 지원금 덕분에 충분히 시간을 갖고 작품에 심혈을 기울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과학연극 '산소'와 '완전한 오해'는 한국과학문화재단에서 일부 지원을 받았다. '잘해봅시다'는 국가경영전략연구원으로부터 제작비 전액(1억5천만원)을 지원 받았다.

새로운 관객층이 형성된다=연극은 보는 사람만 또 보게되는 폐쇄적 성격이 짙다. 주요 관객층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연극 관련 종사자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새로운 소재들은 연극에 관심없던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다. 가령 화학자의 이야기를 다룬 '산소'는 화학도나 화학자 등 관련자들이 관심을 갖게 마련이고 이들이 자연스레 극장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단 연극을 보고 재미를 느끼면 다른 연극에도 관심을 갖기 때문에 관객 저변층이 늘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부에선 이런 유(類)의 연극을 '변질된 연극'으로 간주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을 끌어들이는 연극은 하나의 새로운 추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젊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아있는 연극, 찾아가는 연극'을 주창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련의 과학연극을 기획한 극단 모아의 남기웅 대표는 "영화는 거대 자본으로 성장했다. 더구나 비디오.음반.책 등 관련 산업으로 파급효과가 대단하다. 하지만 연극은 소수의 관객에게만 닫혀있다. 이젠 연극이 그냥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외부자본을 끌어들이고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지영 기자 <nazang@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jd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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