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수상 후임 물망에 오른 제1부수상 등소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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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중공의 장래에 떠오르는 별』이라고 모택동은 50년「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등소평을 소개했던 적이 있다.
주은래의 사망으로 모가 26년 전에 했던 말이 이제 바야흐로 실현될 때가 온 것 같다.
등은 주의 와병에 따라 문혁 때 수정주의노선을 걷는 실권파 제2인자라는 낙인을 극복하고 일어서 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전후, 당부주석·중공군 총 참모장·제1부수상 등 당·군·행정부의 막강한 실력자로 떠올랐다.
등에 대한 이러한 승격조치는 그러나 등의 모·주 후계자로서의 공인이라기 보다는 문혁세대의 잠정적 후견인으로 내세운 것으로 풀이되었다.
그만큼 등은 행정·군·당에 넓은 지면과 탁월한 경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 중공이 공적 제1호로 규정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대소 강경론자인 등이 한층 필요했고 더욱 중공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면서 내부적 안정을 도모하는데도 등이 적격자다.
등은 1902년 사천성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24년 「프랑스」에서 고학 중 중공 당에 입당했다. 등은 34년 장정에 참가했고 52년 국무원부수상에 임명되었다. 55년 정치국위원에 피선된 등은 57년 당 총서기가 되었다.
50년대 말 모가 주도했던 인민공사운동의 실패에 따라 유소기 국가주석과 밀착했던 등은 60년대 중반까지 이른바 실권파의 2인자였다. 이 때문에 그는 문혁으로 실권했었다.
60년대 초 중·소 이념분쟁 때 중공대표로 소련과 협상에 임했던 등은 65년 국방위부주석과 국방원 수상서리를 역임하기도 했다.<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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