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2013년의 미팅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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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0면

이게 얼마만인가.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쭉 같이 다닌 동창 녀석의 목소리가 휴대전화에서 울려나왔다.

본 지가 4, 5년은 족히 된 것 같았다. 가만, 이놈이 뭐한다더라. 맞아,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지금은 연수원에 있겠구만.

그놈이 다짜고짜 물었다.

"이번 일요일에 바쁘냐?"

"뭐, 불러주면 고맙지."

"레지던트들은 휴일도 없다며?"

"이번 주는 놀아."

"잘됐다. 괜찮은 팅 건수가 있다."

"팅?"

"있잖아, 그거."

"아~."

대학교 때 잘 나가는 의대생으로서 거의 세자릿수에 근접할 정도로 미팅에 소개팅을 했지만, 인턴 시절부터는 바쁜 생활에 치여 몇년을 굶었다. 이놈도 시험 준비한다고 고시원에 틀어 박혀 있었으니 마찬가지였겠지.

"몇시에 어디냐?"

"3시까지 ○○ 카페로 나와라. 아, 그리고 성태도 나올 거다."

"성태? 걔 뭐하냐?"

"다음 학기에 박사 받는대. 갈 연구소 자리도 잡혔다더라."

"어~. 일요일에 보자."

옛 생각이 떠올랐다. 전화를 한 놈은 법대를 갔었다. 대부분 사법고시를 치르고 법무관으로 군생활을 하는 게 보통이건만, 이놈은 부모님과 싸우다시피하며 재학 중에 24개월을 만땅 채우고 돌아왔다.

그뒤에 새로 시험준비를 하느라 좀 늦었다. 그리고 성태는…. 2004년 대학에 들어갈 때 그렇게 말리는 자연대를 가더니 결국 박사까지 따는구나. 요즘은 과학기술자들이 좋아졌다던데.

서른 가까운, 선을 볼 나이에 미팅이랍시고 여성 셋을 마주하고 앉으니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니었다. 일단 신상명세를 밝히는 순서부터 시작했다.

레이디 퍼스트. 다음에 우리가 뭐하는 인간들인지를 말하자, 내가 속으로 점찍었던 아가씨가 말을 꺼냈다. 아이고, 어쩜 목소리까지….

"아까 제가 금융회사에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그것도 국내 최고의 금융기관이었지. 그러고보니 연수원 있는 놈도 눈을 반짝이는 게 낌새가 좀 수상했다.

"제가 개인고객 관리 담당이거든요."

더욱 수상한 건 그녀의 눈길이 성태를 향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직업에 따라 개인고객 대출 이자를 조정했는데요, 과학기술자들이 최고 우대를 받게 된 것 아세요? 요즘 과학기술자들 직장이 제일 안정된 데다 보수도 높잖아요.

좋은 논문을 많이 내면 특히 더 낮은 이자율을 적용하도록 했어요. 그쪽처럼 젊은 분들은 아직 연구 업적이 없을 것이라는 점도 계산에 넣어, 뛰어난 과학기술자의 추천서를 받아도 이자율을 낮춰 주도록 했죠.

케네스 윌슨이란 물리학자는 논문이 한편도 없는 상태에서 파인먼이라는 대 물리학자가 추천해 미국 코넬대학 교수가 됐고,결국 노벨상까지 받았다면서요?"

여성들이 찍은 대로 파트너를 정해 헤어졌다가 밤 아홉시쯤 늑대(?) 셋이서만 모였다. 오랜 만에 우리끼리 소주 한잔 하자는 핑계였지만, 사실 성태의 뒷일이 더 궁금해서였다.

그날 우리는 소주를 마시며 좀 묵은 노래 '최진사댁 셋째딸'을 따서 별명을 새로 지었다. "그래, 우린 먹쇠하고 밤쇠다. 성태, 니가 칠복이 해라.!"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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