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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이병원 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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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더벅머리 (뾰루퉁하게) 내 머리 속의 반이 옛날 얘기구, 반이 소리예요.
남자 소리라니? 자꾸 소리라고 하는데 무슨 소리를 한다는 거요?
더벅머리 (모갑을 힐끗 보며) 노래예요. 옛날 노래.
남자 (한 손으로 뒷머리를 썩썩 긁으며) 글쎄?
더벅머리 (어깨춤을 들썩이며) 배워 보겠어요? (모갑에게로 달려가 모갑의 무릎에 놓인 약상자를 내려놓고 대신 북을 놓는다. 모갑, 북을 치기 시작한다) 만루산중 늙은 범 살찐 암캐 물어다 놓고 이리 궁글 노닌다. 광풍에 낙엽처럼 벽해둥덩 떠나간다.
남자 (벙긋벙긋 거리며) 타고난 목청이요! (박수를 친다) 그게 무슨 노래였소?
더벅머리 제비가예요. 아직 반절밖에 못했는데… 배울 수 있겠수?
남자 (불씨를 뒤적거리며) 눈을 씻고 봐도 신통한 거라곤 없네. 쳇, 차디찬 잿더미 뿐이야.
더벅머리 (남자를 쿡쿡 찌르며) 뭘 그렇게 비 맞은 중놈처럼 응얼거리나. 소리를 들었으면 (남자에게 손을 내밀며) 소리 값을 주셔야죠.
남자 (더벅머리의 어깨 너머로 트렁크를 눈여겨보며) 소리 값이라니? 청하지 않은 소리에도 값이 있나? (더벅머리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감아쥐고 앞으로 끌어당기며) 대신에, 더벅머리 (팔꿈치로 남자의 가슴을 밀며) 동전을 입에 물어봐! (입술을 비쭉 내밀며) 이걸로 받을 테니까.
남자 (더벅머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늙은 범에게 잡혀온 살찐 암캐 형상이군 그래.
더벅머리 (기다렸다는 듯이 남자의 어깨에 전신을 기대며) 옛날이었다면 삼패에도 끼지 못한 천하디 천한 계집이지만… 지금은 옛날관 달라. 허우채 안 받고 치마끈 풀 수는 없는 세상인 줄 몰라?
남자 (모갑 쪽을 의식하며 더벅머리를 조금 밀쳐낸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더벅머리 (모갑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모갑이예요, 난 밑천 안 드는 직업을 갖고 있구.
남자 (슬슬 일어나 모갑 쪽으로 가며) 모갑이라구? 기둥서방쯤이 되나?
더벅머리 (자신 있게) 모갑이예요! (남자의 손에서 젖은 옷을 뺏어 들며) 저 사람은 보다시피 봄바람처럼 움직이고 있어요. 이 옷은, (일어나 모갑 앞으로 가서 무릎에 남자의 옷을 널어놓는다) 이렇게 널어놓으면 금방 마를 거예요.
남자 (넋을 빼앗긴 듯이 더벅머리의 행동을 보고 있다가) 그, 그건 중요한 게 들어있는 옷이요.
더벅머리 (남자의 입을 막으며) 쉿! 모갑인 듣지도 보지도 느낄 줄도 몰라요. 할 수 있는 건 내가 눈짓을 하면 신명나게 북을 치는 일뿐이랍니다. 그리구 다음날 팔아야 하는 환약을 만드는 거예요.
남자 (쓰게 웃으며) 결국 약장수로군!
더벅머리 (항의하듯) 약장수라니요? 기생 조합이 있었을 때두, 고급기생들도 우리 소리를 배워야 행세를 했대요. 십장가 못 부르는 기생이 어디 기생 축에나 끼었는 줄 아세요? 모갑이들은 그 기생들의 소리 선생을 했구, 그 기생들은 한다 하는 양반님네 선생이었대요. 그리구 (만족스럽게) 난 모갑이의 선생이구요.
남자 (어리벙벙해서) 누가 누구의 선생이라는 소리요?
더벅머리 (헤실헤실 웃으며 남자의 가슴을 꾹 찌른다) 댁은 또 내 선생이구요.
남자 (박장대소하며) 그렇군! 난 선생님이 되는게 꿈이었소.
더벅머리 (남자의 가슴팎을 더듬는다) 체격이 훌륭하니 선생으로서 적합해요.
남자 (계속 기분 좋게 웃으며) 그래, 약을 팔고, 소리를 팔고, 돈을 많이 벌었겠군. 그렇지?
더벅머리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먹고 남게, 쓰고 남게, 그 정도는 벌어들이지.
남자 (더벅머리를 바싹 죄어 안으며) 돈은 누가 갖고 있소? 어디다 넣어 두지? (고개를 꼬아 모갑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말 안 하는 저 친구가 금고요?
더벅머리 (못 들은 체 남자를 밀쳐 내며) 당신 속옷 주머니에 생쥐가 들어 있는 모양이예요. 바스락바스락….
남자 (모갑과 더벅머리를 차례로 훑어보다가 실망의 한숨을 내뱉는다) 행색들이… 거지 겨우 면한 꼴이군. 거지 사촌쯤은 되겠어!
더벅머리 (남자의 가슴을 계속 더듬는다) 당신 가방은 작아도 꽤 두둑한데… (하다가 남자의 말을 받는다) 어차피 비가 오는 날이니까. (트렁크를 가리키며) 양가죽으로 만든 빨강 구두와 진솔 옷은 모두 저 안에 들어있지.
남자 (기쁨을 감추지 못해 더벅머리를 더욱 힘있게 안으며) 남자의 자색 구두가 있단 말이요? 양복두?
더벅머리 (남자의 옷을 들치고 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뿐이겠어요? 천만금을 주고도 못 살 물건들이 채곡채곡 들어 있지.
남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눈으로 트렁크를 가늠해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 들어 있을까? 들어 있겠지. (더벅머리의 귀에 대고) 난 새 양복에 새 구두만 있으면 결혼두 하고 선생도 할 수 있어!
더벅머리 (생글생글 거리며) 당신 가방엔 뭐가 들어 있죠?
남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제서야 더벅머리의 행동을 의식하며) 손대면 큰일날 물건이요!
더벅머리 (남자의 목에 매달리며) 가르쳐줘, 가르쳐줘요. 당신하고 나하고 인데 알려줘서 나쁠 건 없잖아요.
남자 (거만스럽게 트렁크 쪽으로 가며) 천만금 주고도 못 살 것부터 알려주면, (가슴을 두드리며) 이 속에 있는 것까지 가르쳐 주지.
더벅머리 (달려가 트렁크 위에 앉으며) 부시럭거리는 걸 보니 기껏해야 종이 조각이겠지 뭐.
남자 (찔끔하나 이내) 모르는 소리! 귀중품일수록 너절한 종이에 싸서 간수해야 잃어버리지 않는다구.
더벅머리 (호들갑스럽게 남자의 발 밑에 않으며) 어머나, 아직까지 젖은 구두를 신고 계시잖아. 자 (남자의 구두를 벗기려 하며) 동상에 걸리겠네! 어서, 어서 구두를 벗고 발을 말시세요.
남자 (모갑의 발을 힐끗 보며) 젠장, 죽기살기 약을 만들어 어쩌겠다는 거야!
더벅머리 (남자의 구두를 벗겨 모갑의 구두 옆에 놓는다) 팔면 돈이라구, 약값, 소리 값, 허우채 몽땅 벌어서….
남자 (트렁크 위에 엉거주춤 앉으며) 비가 그치면 곧 떠날텐데….
더벅머리 무슨 소리예요! 이런 오밤중에 길을 나서면 또 개떼들을 만날거예요.
남자 (툴툴거리며) 동네도 없는 곳에 개는 무슨….
더벅머리 (트렁크를 빼내자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다) 늑대겠죠!
남자 (계속 툴툴거리며 일어난다) 비에 젖은 생쥐라고 그랬잖아!
더벅머리 (트렁크를 양팔로 안으며) 어쨌든 비가 갠 아침에 떠나는 게 좋을 거예요. (중앙의 문을 가리키며) 저 문이 정문이니까 아침엔 저리로 기분 좋게 나가자구요. (사이) 자, 이젠 얼굴을 펴고 웃옷이나 벗어 말리세요.
남자 (모갑의 옆에 놓인 북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북을 퉁긴다) 그럼, 이 남자는 왜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거요?
더벅머리 모갑인 내일 팔 환약을 만들어야 하구, 그렇지! 모갑인 푹신하게 마른 옷만 입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솟는답니다.
남자 (북을 발로 탁탁 차며) 그럼 당신은 왜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거지?
더벅머리 (상냥하게 웃으며) 창피한 얘기지만, 목욕을 못해서 눅눅한 물기로 목욕을 하는 중이죠.
남자 (신경질적으로 북을 발길질하며) 제길, 물기로 목욕을 하다니… 어쩐지. 퀴퀴한 냄새가. (코를 싸쥔다.)
더벅머리 (싸늘하게 남자의 등을 보지만 울 듯한 목소리로)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매달리면 번번이 밀쳤죠? (울며) 이런 시골 강바닥에 무슨 목욕탕이 있어야 말이지… 그렇다구… 여자를 거절하다니….
남자 (이를 악물고 더벅머리 쪽으로 다가서며) 자, 자, 그쳐! (입고 있던 웃옷도 마저 벗으며) 난 한밤중에 여자가 울면 참을 수가 없다구! 종일 재수가 없지.
더벅머리 (남자의 가슴에 안기며 남자가 벗은 옷을 한 손에 쥐며) 진짜 운건, 모갑이가 여사당 다섯을 끌구, (숨을 후룩 들이마시며) 거사 다섯 명을 거느리고 동네 마당에서 소리를 할 때, (숨을 깊이 내쉬고 나서) 십장가를 부를 때부터 소나기처럼 쏟아졌다우. 모갑이에게 모든 걸 송두리째 맡겼을 때는… 오늘 비처럼 추근추근 오래 쏟아졌어요. (애처롭게 모갑을 보며) 모갑이에겐 북뿐이예요. (트렁크를 가리키며) 낡아빠진….
남자 (벽난로 위의 촛불을 향해 계속 입 바람을 보낸다) 그 순간 벽난로 위의 촛불이 꺼진다.
남자 (더벅머리를 바닥에 팽개치며) 누가 불을 껐어? 누가 불을 껐냐구? 내 가방, 내 가방, (하며 트렁크가 놓인 쪽을 잠시 생각하고 그쪽으로 더듬거리고 간다.)
더벅머리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고 나서 남자의 가방을 움켜쥔다.)
모갑 (무릎에 놓인 남자의 웃을 주워 입고 더듬거리며 남자의 구두를 찾아 신는다) 잠시후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모갑, 불을 켜고 다시 흔들의자에 앉는다.
더벅머리 (남자의 가방과 옷을 가슴에 안고 미친 듯이 웃어젖힌다) 병신 같은 도둑놈! 빈 트렁크를 들고 지옥행이군 그래! (계속 숨이 막힐 듯 키들거리며) 저 문이 정문이라구? 킥킥킥, (모갑에게) 기어서 올라오지 못할 지하실이죠?
모갑 (트렁크를 묶었던 새끼줄로 문고리를 잡아매며 고개를 끄덕인다.)
더벅머리 (손뼉을 치려다가 들고 있는 가방을 열어 보며) 빈손으로 지옥에 갔으니 계집들이 또 지옥으로 보내겠지. (즐거워 못 견딜 것 같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가방 안의 물건을 꺼낸다) 오, 날강도! 그 도둑놈도 약장수였어요! (모갑의 발 밑에 약봉지들읕 팽개치고 다시 옷의 속주머니를 뒤지다가 비통하게 소리를 지른다) 맙소사! (다시 한 움쿰의 약을 모갑의 얼굴에다 내던지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모갑 (발 밑의 약봉지를 주섬주섬 챙겨서 상자 안에 넣는다.)
더벅머리 (넋이 빠진 듯 모갑을 본다.)
모갑 (흔들의자에 앉아 더벅머리에게 알약을 한 주먹 내민다.)
더벅머리 (바닥에 고개를 박고 미친 듯이 젓다가 남자의 가방과 옷을 모갑에게 던진다) 오늘밤만은 먹을 까닭이 없어요! 허우채를 낼 사내를 따라나서는 게 아니잖아요.
모갑 (담담한 표정으로 계속 약을 내밀고 있다.)
더벅머리 (벽난로 속의 잿더미를 한 주먹 쥔다.)
모갑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더벅머리를 쳐다본다.)
더벅머리 (모갑에게 재를 뿌리려고 하다가 스르륵 놓아 버린다.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너무 많아요. 한 개만, 한 개만 먹을께요.
모갑 (계속 알약을 내밀고 있다.)
더벅머리 (달려가 모갑의 목에 매달리며) 오늘밤은 아무 짓도 하지 않구 얌전하게, 그래요, 얌전하게 옛날얘기나 하면서….
모갑 (더벅머리의 손을 목에서 떼어내 약을 쥐어준다.)
더벅머리 (손에 쥐어진 약을 벽난로 속에 던져 넣는다) 약을 먹지 않아두 내일 소리 값을 많이 벌 수 있어요!
모갑 (다시 알약을 한 주먹 내민다.)
더벅머리 (체념한 듯이 약을 받아 입에 털어 넣고 씹어 삼킨다.)
모갑 (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북을 치기 시작한다.)
더벅머리 (헛구역질을 하다가 바닥에 스르륵 미끄러지며 잠꼬대처럼) 만루산중… 늙은… 버엄…사, 살… (모로 누우며) 졸려, 버…써.
더벅머리, 숨을 거칠게 쉬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모갑은 힘차게 북을 두드린다. 둥둥, 둥둥둥―.
천장에서 먼지가 툭툭 떨어진다. 신들린 듯이 북을 치는 모갑의 얼굴과 잠든 더벅머리의 얼굴에 먼지와 함께 부우연 새벽빛이 덮이기 시작하면 막이 내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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