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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병도 박사|대담: 최창규 <정치사·서울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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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병신=년의 새 아침,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낙산 기슭 이병도 박사(국사·학술원 회장)댁을 최창규 교수(정치사·서울대 교수)가 찾았다. 책과 병풍으로 둘러싸인 서재를 들어서자 이 박사는 80 고령에도 정정한 모습으로 옛 제자(이 박사가 대학원장 할 때 최 교수는 대학원생)를 반긴다.
최=『선생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만.』
이=『아주 좋아요. 아침마다 식전에 산책을 하는데 여기서 많은 효과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박사는 매일 이른 아침이면 동숭동 자택에서 창경원을 경유, 비원까지 1시간이 넘게 산책을 한다고 한다.
최=『산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시는 셈이군요. 특히 최근에 하고 계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옛날 써 두었던 논문들을 다시 손보고 있습니다. 처음엔 간단히 생각하고 그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와 지금과는 문장이나 말이 틀려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더군요. 작년 말에 끝내려고 했는데 금년 2월은 지나야 되겠어요.』
최=『논문 정리가 끝나시면 「프린트」로 된 「자료 한국 유학사」를 다시 정리하신다는 말도 들었읍니다만….』
이=『지금 하는 일을 마치는 대로 바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미 한문으로 나와 있는 「프린트」본에 「닦음」(수양)을 주조로 하는 한국사상과 백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민본사상 등이 우리 나라의 정치·사회·문학·도덕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서양 철학 중 「칸트」·「헤겔」의 사상과 한국사상과를 비교해 볼 필요성을 많이 느끼지요.』
이 박사는 우리 나라 유학 사에서 불교와의 관계, 도참사상과의 관계, 이조 중기 이후의 기독교 관계에 초점을 맞춰 새로이 저술하고 싶다고 그칠 줄 모르는 학문에의 의욕을 보여주었다.
최=『1876년(고종 13년) 병자수호조약으로 쇄국의 문호가 개방된 지 금년이 1백년 째입니다. 국사학계는 물론 다른 방면에서도 개항 1백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지난 1백년을 어떻게 보십니까.』
이=『한마디로 지나치게 공백이 컸던 1백년입니다. 을사보호조약 전부터 시작된 일본의 침투와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1백년의 반이 넘는 세월을 타의로 산 셈이지요. 만약 우리가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상태와는 비교도 안됐을 텐데….』
일제하의 세월들이 한국민의 자주 발전에 너무 폐해가 컸다고 말한 이 박사는 우리 민족의 성격이 평화를 사랑하고, 불의부정에 대적하고, 교육과 문화를 지상으로 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비록 북한과 대적은 하고 있지만 무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최=『새해가 됐으니 모두가 심기일전, 새로운 마음가짐을 했겠읍니다만 우리 후학과 국민들이 지녀야 할 태도가 있다면 무엇이겠읍니까.』
이=『학계에서 젊은이들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너무 발표에만 급급한 인상입니다. 간단한 글·논문이라도 심사숙고한 결정체로 만들어 생명이 길도록 해야할 것 같아요. 졸속으로 많은 잘못이 나타나고 정연한 증거가 없이 비판만 한다면 학자와 국민간에 많은 괴리감이 생길 것 같군요. 한·일, 한·중 관계의 연구가 좀더 활발했으면 합니다.
과거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우리 나라는 온실의 화초는 될 수 없을 것 같아요. 계속 거센 세파에 휩싸이겠지요. 우리 국민도 이를 감내하고 인생을 고해가 아닌 고해로 만들 수 있도록 각자의 「업」에 충실해야 합니다.』
1년에 한두 번 다방에 갔을 때 젊은 학생들이 하는 일없이 소일하는 것을 보면 걱정이 된다는 이 박사는 누구나 역량에 맞는 업을 택해 자부 자강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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