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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일당 5억 '황제노역' 판결한 29년 광주 향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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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 지역에서 오래 일한 판사, ‘향판(鄕判·지역법관)’이 도마에 올랐다. 허재호(71) 전 대주그룹 회장이 교도소에서 ‘일당 5억원’짜리 일을 하게 된 것이 계기다. 2010년 ‘일당 5억원’ 판결을 한 판사가 광주·전남 지역 향판이었다. 당시 광주고법 형사1부장판사였던 장병우(60·사진) 광주지법원장이다. 광주일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장 원장은 1985년 광주지법에 부임한 뒤 8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순천지원에서 일한 것을 빼고 계속 광주에 머물렀다. 대주그룹 역시 광주에 기반을 둔 업체였다.

 장 원장은 508억원 법인세 탈세를 지시한 혐의로 기소된 허 전 회장에 대해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선고했다. 또 “벌금 대신 노역을 하면 1일 5억원으로 환산한다”고 판결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508억원, 일당 2억5000만원’인 1심보다 가벼워졌다. 장 원장은 당시 판결문에서 “818억원 세금 추징금을 낸 점, 개인 재산을 출연해 그룹 회생에 힘쓰고 지역경제 피해를 최소화한 점 등을 참작했다”고 밝혔다. 4년간 해외 도피생활을 하다 지난 22일 귀국한 허 전 회장은 49일 노역으로 254억원 벌금을 때우게 됐다. 광주교도소에 따르면 허 전 회장은 하루 8시간 쇼핑백 만들기나 두부·가구 제조 등을 하게 된다.

 일당 5억원은 유례가 없다. 통상 5만원으로 계산하는 일반인의 1만 배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도 수천만원~1억원 정도였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평등 원칙에 위반되는 황제노역 양형에 통탄한다”고 했다. 인터넷에는 “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하루 수입 3억2500만원보다 많다”는 글이 올라왔다.

장 원장은 일당 5억원 논란에 대해 “(판결이) 확정된 사건을 법관이 다시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만 했다. 대법원은 “1심부터 검찰이 선고유예 요청한 것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처벌을 강화했다”고 해명했다. 1심 선고를 앞둔 2008년 9월 검찰은 허 전 회장에 대해 징역 5년에 벌금 1000억원을 구형하면서 “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며 선고유예를 재판부에 요청했다. 당시 검찰은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기업들이 휘청이는 것을 고려했다.

 법조계의 시각은 다르다. 전북대 김동근(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당 5억원 판결에 대해 “지역 유력 인사와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는 향판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향판 문제는 전에도 여러 차례 불거졌다. 2011년 선재성(52) 전 광주지법 부장판사 사건이 한 예다. 판사로서 법정관리인들에게 친구를 변호사로 선임하도록 소개하고, 변호사에게서 주식 정보를 얻어 1억원의 차익을 챙긴 혐의 등을 받았으나 광주지법은 무죄 판결했다. 당장 “향판끼리 봐주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검찰은 항소심부터 장소를 서울로 바꿔 달라고 요청해 대법원이 받아들였다. 결국 선 전 판사에 대해서는 벌금 300만원 유죄 판결이 났다.

 학교 돈 1004억원을 빼돌린 서남대 설립자 이홍하(76)씨 보석을 놓고도 그랬다. 변호사가 보석을 결정한 판사와 같은 향판 출신이라는 점에 의심이 쏟아졌다. 상급 법원은 결국 보석을 취소했다.

경희대 정형근(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부분 고향에서 일하는 향판들에게는 학연·지연을 통해 접근하기 쉽다”며 “이런 취약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 기자
박민제·권철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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