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서툰 사무직, 밤늦게까지 일하면 수당 더 받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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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내 대기업은 대체로 사무직 비중이 절반을 넘는다. 제조업인 A사의 경우 전체 인력(8만 명) 중 사무직과 연구개발(R&D)직은 65%를 웃돈다. 이 회사 인사담당 임원은 “잔업을 줄이는 형태로 근로시간이 단축되면 생산량이 아니라 과제 수행을 중심으로 일하는 사무직에는 어떤 임금 기준을 적용할지 난감하다”고 말했다.

 이 회사 생산직은 자동화된 라인에서 매뉴얼에 따라 일한다. 그래서 근무시간이 대체로 생산량으로 이어 진다. 근로시간을 임금기준으로 삼아도 큰 무리가 없다는 얘기다. 연장근로시간이 줄면 근무형태를 3교대로 바꾸는 등의 제도 개선을 통해 생산량을 맞출 수 있다. 하지만 사무직이나 R&D직종은 다르다. 이들 직종은 ‘주어진 시간’ 동안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과제’에 맞춰 일을 한다. 인력에 공백이 생겨도 대체하기 어렵다. 국내 기업의 인력구조는 사무직의 비중은 늘어나고 생산직은 주는 추세다.

 문제는 이런 현실이 근로시간 단축 방안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다음 달 중으로 근로시간 단축법을 처리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현재 주당 최대 근로시간인 68시간을 52시간(휴일근로 폐지)으로 줄이는 내용으로 생산직의 근로시간 단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정부 구상대로라면 과제를 제 시간에 수행하지 못해 밤늦게 일하는 사람이 업무 시간 안에 일을 끝낸 사람보다 월급을 더 받게 된다. 성과보다 일한 시간에 따라 초과근로수당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최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무직은 개인별 역량이나 집중도에 따라 성과의 편차가 크고, 근무시간 자체를 측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사무직 의 근로시간에 대한 통계조차 국내에 없는 이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가장 장시간 일하는(2092시간) 국가다. 그러나 노동생산성은 34개국 가운데 28위로 최하위권이다. 근무시간 중 몰입도가 낮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대기업 B사 관계자는 “회사에 있더라도 개인 휴식, 사적 미팅, 동호회 활동과 같은 근로시간으로 인정될 수 없는 상황이 많지만 이를 통제하거나 관리하기는 어렵다”며 “출퇴근 시간에 기초해 연장근로수당을 지급하면 시간만 때우면 임금 봉투가 두둑해지는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김판중 경제조사본부장은 “사무직의 경우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며 “자칫하면 인력운용에 대못 규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영계는 재량근로제와 같은 유연한 근로시간제의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재량근로제는 노사 합의로 실제 근로시간과 관계없이 일정 시간만 근무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따라서 초과근로에 따른 임금은 미리 일정액을 정해 지급한다. 1997년 재량근로제가 도입됐지만 기자나 방송PD와 같은 독립성 강한 일부 직종에만 한정해 시행 중이다. 그나마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 대상자 선정이 곤란하다. 예컨대 R&D 직종에선 신상품이나 신제품 개발 인력에만 재량근로를 인정한다. 연구기획이나 기초소자연구와 같은 전체 R&D인력에 적용하지 못하는 체계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사무·R&D직종에 대해서는 근로시간을 경직되게 규제하기보다 노사 자율권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기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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