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균형 잃을 미 대심원|윌리엄·더글러스 판사 은퇴의 여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워싱턴=김영희 특파원】미국최고 법원인 대심원의 천재라고 불리던 윌리엄·더글러스 판사는 지난해 섣달 그믐날 휴가지 바하마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오랜 투병 끝에 지난가을 휠·체어를 타고 등원한 그는『보행은 판사의 직무수행과는 무관하다』고 하면서 은퇴를 일축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글러스 판사의 계속 재직선언을 환영했다.
그를 자신들의 「미래상」으로 존경하던 많은 법학도, 헌법에 대한 더글러스 판사의 자유주의적인 해석에 갈채를 보냈던 동부 지식인, 그리고 서부에서 가난한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 나서 36년 동안 법조계의 정상에 군림한 더글러스한테서『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구나』는 용기를 얻은 서부의 많은 서민들이 그의 재기에 환성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더글러스 판사는 12일 은퇴를 발표했다.
뉴요크·타임스 사설은 더글러스 판사의 은퇴를「한시대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40세밖에 안된 법학교수 더글러스를 대심원 판사에 임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진보주의자로 일관했다.
정부에 의한 대기업의 통제, 중소기업의 보호를 항상 찬성하고, 언론자유의 열렬한 투사가 됐다. 그는 대심원에서 명예훼손 법이나 외설규제법에 반대하는 소수의견을 대표했다.
더글러스 판사를 상대로 의회는 세 번이나 탄핵 안을 냈다. 그것은 자기가 사는 시대를 훨씬 앞질러 가는 이단자의 고통이요, 자랑이었다.
하원의원 시절의 포드 대통령은 1970년 더글러스 판사를『히피·이피 혁명의 신봉자』라고 규탄하면서 탄핵제의를 했다. 그런 포드 대통령이 12일 더글러스 판사의 서한을 받고는 국민을 대표해서 지금까지의 그의 봉사에 감사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포드 대통령과의 관계에 관한 한 더글러슨 판사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은퇴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은퇴를 꺼린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포드에게 후임판사 임명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거를 앞두고 극우보수파인 리건의 추격을 받고 있는 포드가 지명하는 대심원 판사면 보수적인 판사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대심원이 유지하고 있는 보수 대 자유주의의 균형이 무너지고 대심원은 보수파 우세로 기울게 된다.
그래서 더글러스 판사는 포드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버티기로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령 포드가 신임판사로「자기 사람」을 지명하면 당장 사형제도폐지에 관한 판결이 영향을 받게 된다.
더글러스 판사를 제외하고 지금 남은 8명의 판사들은 대충 4대4로 입장이 완전히 양분되어 있다.
거기 보수파가 충원되면 사형제도에 관한 대심원 판결은 5대4로 사형제도 합법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내려질 것이다.
그밖에도 낙태·외설영화·인종차별 폐지를 위한 강제버스통학 같은 문제에 관한 판결이 영향을 받는다.
포드 대통령 부인은 자기가 더글러슨 판사의 후임으로 주택도시개발장관 칼러·힐즈 여사를 지명하도록 권고하겠다고 말했으나 대심원판사의 임명은 과거의 예로 보아 상원의 승인기준이 까다 로와 쉽게 이루어질지는 의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