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심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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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영국BBC「라디오」의 인기「프로그램」가운데 『무인도레코드』란 것이 있었다. 무인도에 혼자 된다면 어떤 「레코드」를 갖고싶으냐는 「프로그램」.
이 무렵 30대의 지휘자이던 「앙드레·프라빈」은 이 「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 받았다. 그는 서슴지 않고 「런던·심퍼니」의 수석지휘자가 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한편 놀라고 또 한편 대단한 야심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프레빈」은 반년 뒤에 그 꿈같은 「런던·심퍼니」의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프레빈」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색적인 것이 한둘이 아니다. 독일태생에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영국으로 전전, 국적을 몇 번이나 바꾸었다.
「프레빈」은 모 영화음악에서 「클래식」으로 전신한 경력도 갖고있다. 정말 그가 유명해진 것은 영화음악의 작곡·편곡으로 영화의 「노벨」상격인 「아카데미」상을 네 차례나 받은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의 인상에도 남아있는 『마이·페어·레이디』라는 영화의 음악편곡으로 그는 「아카데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프레빈」은 소년시절부터 고전음악에 익숙해있었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네 살 때 이미 「피아노」를 연탄한 일이 있을 정도였으며, 「야샤·하이페츠」(바이얼리니스트) 는 부친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미국이주의 길을 터준 것도 바로 「하이페츠」였다. 「프레빈」의 음악생활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런던·심퍼니」와의 녹음연주 때였다. 1964년 RCA와의 계약으로 「차이코프스키」제2교향곡 등을 연주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미국 「휴스턴·심퍼니」와 「런던·심퍼니」의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나 1969년 그는 갑자기 「휴스턴·심퍼니」로부터 해임되었다. 현재의 부인 「미아·팰로」와의 연사 때문이었다. 당시 22세의 「팰로」는 51세의 「시내트러」와 결혼한 일로 화제가 되었던 여배우. 「텍사스」주의 보수적인 기질은 「프레빈」의 「스캔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런던·심퍼니」를 「롤스·로이즈」보다 더 귀중한 해외수출감으로 여긴다.
1904년 영국최대의 「퀸즈·홀」관현악단 「멤버」들이 주동이 되어 창단한 이래 「쿠세브스키」 「멩겔베르그」 등 거장의 지휘자들이 이 교향악단을 거쳐갔다. 「조지·셀」「피에르·몽토」 「비참」 등도 모두 「런던·심퍼니」의 지휘자를 거쳤다.
오늘날 「프레빈」과 같은 이색 지휘자에게 그 「바통」이 넘겨진 것은 까닭이 있다. 「패트런」(후원자) 없이 단원들만의 자영에 의해 운영되는 이 교향악단에 그는 어느 때 없이 활기를 불어넣었다. 「프레빈」이 지휘한 「심퍼니」의 음반은 거의 세계음악애호가들의 인기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심퍼니」의 생명은 지휘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바로 이들의 내한공연은 우리의 메마른 정서생활에 훈풍을 불어넣어 주는 더없이 귀중한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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