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무력 동원 주저않은 푸틴 … 행동할 때 안 한 오바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 급진전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19일 친러시아 병력 200명이 세바스토폴의 우크라이나 해군기지를 급습해 장악했다. 해군기지 광장엔 러시아기가 게양됐다. 이날 사복 차림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친러시아 병력이 지키고 있는 해군기지 정문을 줄지어 빠져나가고 있다. [세바스토폴 로이터=뉴스1]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대해 AP통신 등 외신들은 19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완승’ ‘속전속결로 상황 종료’ 등 논평을 쏟아냈다. 러시아 연방헌법재판소는 이날 푸틴이 서명한 크림자치공화국과의 합병조약에 대해 만장일치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합병을 위한 법적 절차는 조약에 대한 러시아 상·하원의 비준만 남았다. 전문가들도 푸틴 대통령의 통치 철학인 ‘푸틴 독트린’이 이번 승리를 이끌어냈으며 ‘강한 러시아의 부활’에도 한층 다가섰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푸틴 독트린의 핵심은 1991년 미·소 냉전체제 붕괴 후 추락한 러시아의 위상을 미국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겠다는 것이다. 크림 사태에서 푸틴의 이런 전략은 여실히 드러났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푸틴은 주저 없이 군사력을 동원해 크림반도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서방의 비난에도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정치를 보여준 것이다. 크림반도 접수는 주민투표로 이어졌고, 결국 러시아와의 합병을 이끌어냈다.

 푸틴 독트린의 또 다른 축인 강력한 국가안보 체제 구축은 이번 사태의 핵심 중 하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동진(東進)에 적지 않은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나토의 미사일방어(MD)시스템 등은 러시아엔 큰 위협이다. 특히 크림반도 세바스토폴항의 러시아 흑해함대는 나토와 맞서는 핵심 전력 중 하나다. 푸틴은 18일 의회 연설에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려는데 어떻게 흑해함대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며 크림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크림반도는 서방보다 러시아에 훨씬 큰 전략적 가치가 있는 지역이기에 러시아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오히려 이란 핵문제가 서방엔 더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18일자 인터내셔널뉴욕타임스는 “서방의 고위 관리들이 크림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란 핵문제에 대한 서방과 러시아의 공조는 깨지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또 푸틴 독트린은 국내 정치에서 강한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소치 겨울올림픽에 이어 크림반도 합병이 향후 푸틴의 행보에 한층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국영방송 RT는 “크림반도 합병에 대한 러시아 내 여론조사에서 90% 이상이 찬성한 만큼 푸틴의 대중적 인기는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틴의 거침없는 행보에 서방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당장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질책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오바마와 대결했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18일자 월스트리트저널에 ‘실패한 지도력의 대가’라는 제목의 기고를 했다. 그는 “미국의 행동이 가능할 때 제대로 움직이지 않은 것은 대통령의 실책”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포스트도 “펜타곤(국방부)이 이번 사태를 통해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서방은 뒤늦게 사태 반전을 꾀하고 있다. 주요 7개국(G7)은 러시아의 G8 회원 자격을 정지시켰다. 대신 G7은 다음 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따로 모여 이번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것이 정세 분석가들의 설명이다. AP 등은 “강력한 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고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러시아의 에너지와 군수산업에 대한 금수조치 등을 취할 경우 글로벌 경제에 대한 악영향은 물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양측의 무력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러시아가 절대적인 군사력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기문 총장, 오늘 푸틴과 회동=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20일 푸틴 대통령을 만나 이번 사태에 대한 평화적인 해법을 촉구할 예정이다. 반 사무총장은 앞서 “우크라이나 사태의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위기를 종식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건설적 대화를 재개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우리 정부는 성명을 통해 “크림 주민투표와 크림 합병을 인정할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의 주권, 영토 보전과 독립은 반드시 존중돼야 한다”고 밝혔다.

최익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