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전국학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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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브라운소장 면담
「스티코프」일행이 덕수궁으로 사라지자 군중은 다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나는 옆에있는 자전거 위에 올라가 즉석 연설을 했다.
나는 「결사반탁」「결사반탁」을 선창, 군중이 복장케하여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킨다음 주먹을 쥐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대한문은 망국의 설움이 새겨진 문입니다. 일찌기 고종황제의 인산때 백성들이 붙들고 통곡한 문이며 이 광장은 3·1독립운동의 함성이 휩쓸고간 광장입니다. 지금 독립은 되었다하나 열강의 마수가 또다시 뻗쳐 신탁의 굴레를 씌우려합니다. 우리 대한문으로 들어가 신탁의 음모를 분쇄합시다-·』 10여만 군중은 일제히 「와」「와」 소리를 지르며 대한문쪽으로 밀려갔다.
양근춘 (고대) 정국권 (성대) 이혜승 (배재) 허원섭 (성남) 등 학련의 명장들은 덕수궁 돌담을 넘으려고 미군MP와 접전을 벌였다. 군중은 일시에 대한문을 넘어뜨릴 기세였다.
위급한 찰나였다. 이때 덕수궁안에서 장택상청장이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달려왔다.
장청장은 아까 말에서 떨어진후 덕수궁에 들어가 어떻게 미대표 「브라운」소장을 구워삶았는지 군중대표와 「브라운」소장과의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역시 장청장은 협상의 명수였다.
그는 이 면담을 통해 흥분한 군중을 가라앉히고 자기책임도 면하는 한편 공위측에 한국인 의사도 전달하려 했던 것 같다.
나는 즉시 김호영·홍일을 면담대표로 선정, 함께 덕수궁으로 들어갔다.
군중은 우리를 응원하려는 듯 더욱 기세를 올려 반탁구호를 외쳤다.
석조전까지 걸어가는 동안 가슴이 뛰었다.
반탁을 받아들이지 않는 미국측 대표를 만나러 가는데 어찌 가슴이 평온하겠는가? 장정창의 안내로 「브라운」소장과 석조전안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온화한 성품의 중년신사였다. 그러나 나는 긴장을 팽팽히 느끼며 평소 갖고있던 소신을 밝혔다.
『왜 미국은 그렇게 어리석은가. 소련은 북한에 인민정부를 만들고 남한도처에서 「테러」·「스트라이크」를 자행하는데 그들과 손잡고 민주정부를 수립하겠다니 어부성설이다.
우리는 5천년 문화민족이다. 탁치를 결사반대한다. 이박사를 받들어 자주독립국가를 만들겠다. 밖의 함성을 들어봐라. 끝내 신탁통치를 강요하면 우리는 제2의 3·1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나는 사정반 으름장 반으로 할말을 다했다.
「브라운」은 연방 장청장의 얼굴을 살폈고 통역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우리주장을 통역했다.
얘기를 듣고난 「브라운」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미스터·리」, 잘 알겠소. 탁치를 반대하는 것은 한국인의 자유요』이렇게 말했다.
나는 머리가 번쩍했다. 지금까지 미국은「모스크바」결정대로 조선에 신탁통치를 하겠다고 주장한게 아닌가? 그런데 이제 탁치반대의 자유가 있다고 하니 중대한 발언이었다.
우리는 뛸듯이 기뻤다. 가슴이 부풀어 뒤돌아 나왔다.
창낭은 내등을 툭툭치며 『이군! 이제 시원한가. 난 자네 때문에 수도청장 못해 먹겠네』하며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우리 3명이 대한문 앞에 나타나자 반탁구호를 외치던 구중은 갑자기 숨을 죽이고 우리를 주시했다.
나는 급히 자전거위에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는 『「브라운」소장이 반탁은 한국인의 자유라고 했읍니다』고 소리쳤다.
군중은 함성을 질렀다. 정말 가슴벅찬 순간이었다. 시위군중은 완전히 축제「무드」가 되어 남대문쪽으로 밀려갔다.
나는 선두에서 장갑진(상대) 손영섭 (동대) 고병두 (한양공)등과 질서를 유지하며 평화적인 시위를 전개, 안국동「로터리」에서 해산했다.
그날밤 돈암장으로 이박사를 찾아갔다. 이박사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넨 개국공신이야.
큰일을 했어!』하며 부둥켜안고 격찬해 주었다.
「브라운」소장에 의한 반탁시위의 긍정적 반응은 마침 미국이 「트루먼·독트린」을 선언, 대공산유학정책을 강경정책으로 바꾼 이유가 컸음이 분명했다.
이날 반탁시위를 뒷받침한데는 당시 보건후생부 (현 보사부)재해구호과장이던 조양환선생(현국민회의대의원)의 숨은 공로가 컸다.
조선생은 재정난에 허덕이는 학련의 참상을 필자와 조병후(감찰부장) 양근춘 (송무부장)동지로부터 듣고 당시 국도극장에서 공연중인 「춘향전」에 입장료 10원씩을 더 붙여 1백80만원가량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물론 배후에는 당시 미군정민정장관 안재홍씨, 인사처장 정일형박사의 소개와 보건후생부장인 이용설박사의 배려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생의 애국심과 용단이 아니었다면 그런 거금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감격하여 그를 학련의 고문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조선생은 『내게 필요한 건 감투가 아니야. 이 돈으로 공산당의 콧대기를 눌러주게!』하면서 우리 손목을 잡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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