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 사랑과 봉사의 7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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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대한적십자사는 10월27일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일제에 의한 강제 폐문의 시기가 있었기는 하나, 인도와 평화를 상징하는 적십자의 깃발이 이 땅에서 휘날린지 벌써 70년이 된 것이다.
1905년 고종의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이 제정, 공포되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적십자사가 발족한 이래 이 거룩한 인류애 운동의 의미는 온 국민에게 깊숙이 심어져 왔다. 특히 6·25 동란을 통해서 동포의 불행과 고난을 덜어준 한적의 헌신적 활동은 국제적십자사의 지원과 함께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밖의 각종 재민 구호와 국민 의료 사업·헌혈 운동·사회 봉사·청소년 지도 사업 등도 물론 그간의 주요한 업적들이다. 뿐만 아니라, 한적은 최근 10여년래로는 국제 친선 활동에도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올해 5월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청소년 적십자 지도자 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할 만큼 국제적인 성가를 높였다.
5월에는 또 월남 피난민 1천5백명을 맞아 긴급 구호 활동을 벌이고 추석에는 30, 40년만에 고국을 찾은 재일 조총련계 교포를 접대하는데 앞장섰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억되는 중요한 업적은 「남북적십자 회담」의 추진 노력이다.
71년8월12일 한적이 세계의 의표를 뚫고 남북으로 흩어진 1천만 이산 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인도적 남북 회담」을 제의, 거의 4반세기 동안 두절되어 있던 남북간의 대화의 가교를 놓았던 것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기록될 획기적 사실이었다고 하겠다.
분명히 「금세기 인류의 상징적 비극」으로 표현되었던 흩어진 이산 가족의 비극을 해소하려는 이 성스러운 노력은 참다운 적십자 정신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과 평양을 7차례나 오간 적십자 본 회담은 오늘날 북적 측의 정치 편향 때문에 답보 상태에 빠져 의제 제1항을 토의하는 단계에서 중단되고 있다. 적십자 정신에 기반을 둔 인도적 심인 사업조차가 현실적으로 좌절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적십자 회담의 추진 노력은 이를 방해하는 정치적 책략의 불순성 보다는 훨씬 명예롭고 값진 것임에 틀림없다.
정치적·군사적 고려를 떠난 순수한 인류애가 적십자 운동의 기본 정신이며 「뒤낭」의 국제적십자 창설 이념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라가 이미 1903년 최초의 적십자 조약인 『육군의 부상자 상태 개선에 관한 「제네바」협약』에 가입하고 55년 한적이 적십자 국제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74번째 회원사가 된 것도 그 기본 정신을 중시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제 위원회 가입사는 1백22개에 이르렀지만 그들 일부 국가 중에는 적십자 운동의 본지를 외면하여 이 기구를 인도주의 정신과는 위배되는 정치적 목적에만 이용하려는 통탄스런 경향도 생겨나고 있음을 본다.
오직, 정치적인 목적 달성에만 혈안이 돼 있는 북적의 처신이 바로 그 전형적인 실례라 할 수 있다. 순수한 인도주의적 가족 찾기나 조상에 대한 성묘 행사조차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드는 북적은 인류의 양심 앞에 마땅히 대오 각성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적으로서는 북적의 모호한 반응에 구애됨이 없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꾸준하게 박애와 봉사의 적십자 정신을 지키는 성실성을 견지해야할 필요가 있다.
비록 당장에는 얻는 것이 없다하더라도 사랑과 헌신으로 인도주의 정신을 지키려는 노력은 적십자의 근본 정신일 뿐 아니라 인간 도덕의 지상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한적 창립 70주년은 과거의 빛나는 업적을 자랑하는 기회라기보다는 오히려 내일을 향해 더 무거운 짐을 지겠다는 맹세의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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