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작사자 윤치호설에 유력한 증거|윤치호 담술『찬미가』에 수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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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70여년간 분명치 않은채 불려오고 있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고주옹윤치호선생(1866·2·11∼1945·12·6)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다.
이같은 사실은 문학평론가 임중빈씨(인물연구소대표)가 고윤치호선생의 일대기를 연구하기 위해 윤치호씨의 장남 윤영선씨(79·서울종로구견지동46)가 소장하고 있는 윤치호씨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찬미가』(원본 1906년 간행추청·재판1908년) 3편과 고윤치호씨가 1945년 작고하기 직전에 써둔 애국가육필원본, 재미동포 양주은옹(99)이 소장하고 있는 『애국가』원본이 든「사진전」등에 의해 확인됐다.
임씨가 제시한 1908년6월25일 재판으로 간행된 B40판 소책자 16면 『찬미가』는 윤치호역술(역술)로 되어있다. 여기에는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를 비롯, 『무궁화가』『대한제국 황실가』가 제14, 제10, 제1로 수록되는등 모두 15편의 시가가 한글로 실려있다. 세가지를 뺀 12편은 모두 국역찬송가들.
여기에 수록된 『찬미가』제14에는 현행 애국가 1절의 「우리나라만세」가 「우리대한만세」로, 2절의「바람서리 불변함은」이 「바람이슬 불변함은」으로, 4절의「충성을 다하여」가 「님군을 섬기며」로 되어있고 약간의 구식표기법을 썼을뿐 나머지는 똑같다. 『찬미가』 제10의 『무궁화가』후렴도 현행 애국가 후렴과 글자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다.
또 윤치호씨가 l945년12월 뇌일혈로 급서하기 직전에 붓글씨 친필로 써둔 애국가원본도4필2행의 「님군을 섬기며」를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쓴 이외에는 『찬미가』 제14의 애국가 원문 그대로다. 이 육필원본의 말미에는 「1907년 윤치호작」이라고 씌어있는데 윤씨 유족은 윤씨가 고령에 쉽게 작사연도가 생각나지 않아 얼결에 쓴것으로 보고있다.
다음에 재미동포 양주은씨가 갖고있는 사진첩 안에 수록된 애국가 원본에도 4절2행 「님군을 섬기며」가 「민족을 모흐며」로 되어 있을뿐 다른 부분이 다 똑같은데 이 인쇄물의 제목 밑에 「윤티호」라고 기재돼있다.
임씨는 이밖에도 윤치호씨가 해방직후 국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해방이 되니 모두들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애국가로 부르는구나. 일찌기 내가 지은것을 알면 국민들이 안부를 지도 모른다』고 실토한점(당시 윤치호씨는 친일파로 몰려있었음), 윤씨가 세운한영서원의 학생이었던 최규남 김동성씨등의 증언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임씨는 애국가 각사연도에 대해서는 윤씨가 외무협판(외무차관)으로 재임시 고종황제로부터 명을 받아 지었다는 것이 여러가지 자료에서 나타나므로 외무협판으로 있었던 1904년3월부터8월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신종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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