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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7)제47화 전국학련(6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와 잘 아는 최운하사찰과장의 호의는 나의 정체를 탄로 내고 말았다.
나는 정체를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서 「웨디카」(미CIC과장)에게 『내가 바로 이철승이오』라고 실토했다.
「웨디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안경을 썼다 벗었다하며 『갓템!』을 연발했다.
그러나 나는 바로 협상(?)을 걸었다.
『1·18기념행사는 옥내에서만 하겠다. 연행된 5명의 우리맹원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다. 「웨디카」는 노발대발하면서도 들락날락하면서 상관과 무엇인가 숙의했다.
뒤에 알았지만 그동안 최과장은 장택상 수도청장에게, 인촌은 설산장덕수선생을 「윌슨」 미국인 서울시장에게 보내 우리의 석방을 교섭했다.
이와 같은 막후교섭 탓인지 나의 협상안은 받아 들여져 『절대 불법「데모」를 하지 않고 소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나는 연행된 5명과 함께 석방됐다.
학련간부검거령이 내려져 학련은 임시본부를 익선동의 장부억동지(고대·6·25때전사) 집으로 옮겨놓고 있는 것을 수소문결과 알아냈다.
그의 집은 비원앞 지금 「대하」요정자리. 거기엔 유구환 황천성 오홍석 양근춘 박철용(이상고대) 홍관식(동대) 은종관(문리대) 배현종(공대) 고영구(성대) 김경만(휘문)등이 모여 있었다. 우리를 보자 그들은 환성을 터뜨렸다.
드디어 1월18일 하오2시 『매국노 소탕대회』 및 『탁치반대투쟁사 발표대회』가 열리는 천도구당에는 각급 학교 맹원 3천여명이 꽉 들어찼다.
단상엔 김구 김성수선생등 민족진영 지도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대회장 밖에는 장택상수도청장이 경찰 5백여명을 대동하고 나와 「데모」방지를 직접 진두지휘했다. 바깥 분위기는 삼엄했다.
대회는 김득신군(연대)의 사회, 나의 개회사, 김구·김성수선생의 격려사에 이어 최찬영군(서울상대)의 「이북학생 투쟁사」, 송원영군(고대) 의 「1·18반탁학생 투쟁사」, 김진철군(감신대)의 「민족정기의 투쟁」등 젊은이들의 열변이 뜨거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대회이서 가장 감명깊은 것은 조지훈선생(전고대교수·청녹파시인)이 「전국청년문학가협회」의 대표자격으로 나와 「메시지」를 낭독한 것. 『우리들은 전국청년 문학가의 이름으로 친애하는 동지 그대를 조국사수의 불타는 투혼앞에 최대의 찬사를 보낸다.』 그의 격정에 넘친 격려는 계속됐다.
『비록 불의의 백성이 있어 신탁의 비운을 굴레 씌운다 하기로 끝까지 타협과 굴종을 거부하고 우리들 8백만 청년이 먼저 같은 감옥에서, 같은 벌판에서 죽어가기를 피로써 맹세하자』 조선생의 연설은 뜨겁고 깊게 우리를 감동시켰다.
뒤이어 도미중인 이승만박사에게 반탁외교의 성공을 비는 전문을 보내기로 결의하고 곧「데모」준비에 들어갔다.
장내가 술렁댔다.
맨 앞장 설 이희준(상대·6·25때전사) 박영철(고대) 정의진(고대·노총국장) 최봉린(성대·인천체전교수) 심영택(단대) 이학구(공대)등 별동대가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규룡(배재) 손완식(성남·금성사이사) 최광호(서울공) 유계영(대동) 이희길(서울중) 정운흥(경신)등은 서로 조를 짜기 위해 왔다갔다했다.
이때였다. 단상에서 우리의 동태를 지켜보던 김구선생이 『여러분!』하며 「마이크」앞으로 나오시는게 아닌가.
장내는 다시 한번 쥐죽은 듯 조용했다.
김구선생은 아무말 없이 장내를 한바퀴 훑어보시더니 『모두 일어서시오!』라고 벽력같이 호령했다.
모두 깜짝 놀라 일어섰다. 그랬더니 이젠 『앉으시요!』하고 다시 호령했다. 모두 꼼짝 못하고 앉았다.
감히 누구의 말씀이라고 거역하겠는가.
김구선생은 무서운 얼굴로 다시 한번 우리를 노려보시더니 『내 말에 따를 사람은 손을 들어보시오!』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모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제서야 김구선생은 타이르듯 모두 손을 내리라고 한뒤 『여러분은 지금 내 명령에 따르겠다고 약속했소. 지금 나의 심경을 말한다면 여러분의 앞장에 서서 자주독립만세나 실컷 부르고 싶은 심정이지만 지금 이 싯점은 멀리 내다보고 신중해야 할 때요. 오늘만은 과격한 행동을 삼가고 조용히 해산해 주길 바라오―』 이렇게 간곡히 당부했다.
평소 김구선생은 짚신감발로라도 반탁투쟁에 앞장서겠다는 분, 그러나 이날은 적극 만류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당시 김구선생은 이박사로부터 「데모」를 막아달라는 간곡한 전보를 받았다.
이런 내용의 전보는 나도 몇차례 받았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데모」를 하라는 식이고 어떤때는 말라는 식이어서 당황했다.
이박사의 이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중에야 안일이지만 이박사의 첫 방미외교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뒤에 이르러 미의 대한여론이 호전됐고 국내에서의 소요는 오히려 그의 외교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이박사는 「데모」저지의 전문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면을 알 수 없는 나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김구선생의 부탁을 거역할 수도 없어 사회를 맡은 김득신군에게 전원 해산토록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때부터 생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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