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1)전국학련-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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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군정법령 제102호」에 의해 설립된 국립서울대학교는 등교 첫날(9월2일)부터 국대위 반대집회와 서명운동이 벌어져 혼란상태를 야기했다.
과격한 내용의 성명이 쏟아져 나놨다. 교내 곳곳엔 「포스터」와 격문이 나붙었다.
『국대안은 미국의 식민지교육정책이다. 망국적인 이 안을 결사 반대하자!』 『비민주적인 국대안은 등록거부로 대처하라!』 『교수단에서도 모두 사표를 냈다. 교수 잃고 무슨 공부를 할 것인가!』「학통」이나 좌익계 「공청5인 소위원회」는 조직적인 학생동원을 위해 국대위반대학생공동투쟁위원회를 학원 안에 결성하여 각 대학이나 중학교까지 동정 맹휴를 지령했다.
그들의 제1차 적인 투쟁수단은 재학생 등록 거부와 신입생 등록 마감-. 그래서 등록기간 연장과 등록하지 않으면 신입생을 별도 모집하겠다는 총장의 경고도 나왔다.
등록 마감날이 되어서는 교문 앞에 기마 경찰을 출동시켜 학생들의 집단 등록을 보호까지 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는 가운데 등록학생수가 계속 늘어나자 좌익학생들의 투쟁방법은 등교거부와 수업방해, 교수축출 운동 등으로 바뀌었다.
좌익학생들은 학교길목에 지켜 섰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회유,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학생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등교거부를 방해하는 적극적인 수법도 등장했다. 『너 학교 나오려면 관을 짜놓고 나와라』는 협박이 그 한 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스크럼」을 짜고 교점을 누비며 적기가를 부르는가하면 강당에서는 소위 좌익학생들에 의해서 열성자 대회를 열어 소란을 확대해 나갔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처장으로 계셨던 이선근 박사(현 동대총장)는 다음과 같이 그 때를 회고했다.
『나는 초대 이춘호 총장과 최규남 교무처장이 취임한 뒤 좌익학생들의 교내 소요행위 때문에 누구도 맡기를 꺼려해서 공석으로 오랫동안 비워둔 학생처장자리를 이총장과 최박사의 요청으로 맡아 서울대학교에 부임했다. 나는 당시 한성일보 주필 을 맡아보면서 청년운동(대동청년단)에 관여했었다.
학원 내 질서는 엉망이어서 학생처장인 나도 「정」군, 「채」군 등을 아예 학생처직원으로 채용하고「보디·가드」로 항상 수행하고 다녔다.
애국 애교하겠다는 소위 열성자 대회가 학생처장이나 총장의 사전허가 없이도 좌익학생들에 의해서 열리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순진한 학생이나 중간파학생들이 멋도 모르고 이용당했다.
나는 그때마다 갖은 위협을 무릅쓰고 집회를 유산시켰다. 좌익학생들은 교수도 분간 없이 「테러」와 협박을 일삼았기 때문에 생명을 건 학원 정상화 노력이었다.
공산당에 의한 국대안 반대투쟁은 사회 일반시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 가증스럽고도 유치한 수법까지 동원됐다.
「국대안 반대」와 「쌀을 달라」는 구호를 같이 붙이고 순진하고 가난한 시민 층에게 계급투쟁의 불을 질렀다. 그때 물가는 「인플레」 때문에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었고 가뭄과 흉년이 겹쳐서 보리 고개를 넘기기가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쌀을 달라」는 구호는 지식인들한테는 속이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서민층에게는 크게「어필」하는 술책이었다.
46년10월10일 「전국학련」은 사무실을 안국동에 있는 이문당(현 신민당 중앙당사)으로 옮긴데 이어 마침내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민족적 양심을 발휘하여 반탁운동을 더욱 맹렬히 하겠다. 그리고 국대안 반대분자들에 의한 학원의 동맹 휴학이나 파괴활동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 학생의 유일한 전국조직인 「전국학련」은 비상대책회의에서 「국대안 반대」를 쳐부수려는 반대투쟁을 결의하고 청년단체를 포함한 민족진영의 애국단체연합회의를 연일 소집했다. 우리는 대책을 세우기에 골몰했다.
「전국학련」조직을 통해서는「국대안 반대」는 공산당의 남한적화 전략운동이라고 규탄하고는 적극 투쟁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각지방조직을 동원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전국에 중앙간부들을 파견했다.
이와 때를 갈이해서 각 학교안「전국학련」 우익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정상화에 손을 댔다.
상대의 경우 보전선배로 열렬한 반공교수인 박용하 학장 취임을 계기로 반공사상이 투철한 서북학생인 거창준 거정학 홍종철 김재용 등 20여명을 입학시켰다. 그래서 그 동안 싸워온 최찬영 김재정 현영원 장위준 유호선 장갑진 이창왕 등 우익용사들의 힘을 배가시켜 주었다.
연대도 『맹휴「스트라이크」』 결의를 어기고 등교한 이동원 김득신 박세영 장정덕 안경득 방우형 등 우익학생들이 노천극장에 끌려나가 살벌한 인민재판을 받는 소동을 벌였지만 이들의 굽힐 줄 모르는 투쟁과 당시 대동신문기자로 있던 최중하 동지의 『「니콜라이」소련교육국장이 남로당에 국대안 반대를 지령했다』는 폭로기사를 써서 그 동안 멋모르고 동조했던 학생들도 자주성에 대한 침해라고 생각하여 돌아섰다. 고 결과 맹휴파의 기는 꺾였다. 연대는 맹휴가 실패로 끝났다.
고대에서도 나는 3개 반의 별동대를 편성, 장익삼 별동대는 돈암동, 박석규 별동대는 성동역, 김동흥 별동대는 신설동에 배치해서 순진한 학생들의 등교를 보호했고, 학생들 출석을 점검하며 중립 운운하는 교수에게 압력을 가하여 학원을 정상화시켜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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