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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의 위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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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구에서는 교사경력을 가진 작가들이 많다. 그러나 학교생활을 소재로 한 소설은 거의 없다. 도시학원이란 작가에게 있어서는 매력 있는 세계가 못되는 모양이다.
소설이나 극이 재미있으려면 주인공끼리의 갈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사들의 생활에는 멋진 갈등을 벌일 만큼 기복이 있거나, 재미있는 장면이 거의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교사라는 직업부터가 독자들에게는 별로 매력 있는 게 못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에릭·시갈」의『러브·스토리』의 무대는「하버드」대학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도 대학교수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레마르크」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보면, 전쟁에 회의를 느낀 어떤 독일병사가 옛 대학교수를 찾아간다. 여기에 비해 미국의 대학교수는 그만한 권위도 갖지 못한 탓일까.
중-고교 교사로 내려가면, 매력 같은 것은 더욱 문제가 안 된다. 교사를 자신이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생각을 아예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설거리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의 사립 교에서는 이사회가 제일이다. 교사의 임명권도 그들이 쥐고 있다. 교장도 어느 의미에선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공립 교에서는 또 교육위원회가 모든 걸 쥐고 흔든다. 교장도 머리를 들지 못한다.
애써 소설거리를 찾는다면『다와 동정』에서와 같이, 여교사와 남학생의 관계에서밖에는 없다.「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학교란 그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어엿한 인격을 가진 교육자를「프랑스」의 학교에서도 바라지 않기 때문일까.
「마르셀·파뇰」의 희곡『토마즈』에서 사립중학교사인「토마즈」는 유력자의 아들에게 낙제점을 줬다 해서 교장으로부터 파면된다. 그를 파면시키지 않는다면 교장의 자리가 위태로운 것이다. 다만 예외로 영국의 소설에서만은 제법 학교얘기가 많이 나온다. 교수나 교장이 그만큼 매력적 이어서일까, 아니면 권위가 있어서일까.
「제임즈·조이스」의『젊은 날의 예술가의 초상』 에서 주인공은 생도 감에게 억울한 매를 맞는다. 그러자 그는 곧 교장에게 직소한다. 교장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인 것이다. 「토머스·휴즈」가 쓴『「톰·브라운」의 학교시절』에 나오는 교장은 완전히 절대적인 존재다. 이 사회도, 교육위원회도 그에게 간섭하지 못한다. 학생 중에는 전직 수상·현직 각료의 자제들도 많다. 그래도 간섭을 못한다. 이래서 개구쟁이 학생들도 교장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장들은 학교 밖의 눈치 볼 일이 너무도 많다. 교사들은 또 근무시간의 45%를 행정업무에 바치고 있다. 교육 자라기 보다 서기와도 같다. 희화 감 밖에 안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또 교장이며 교직원들이 부교재문제로 학생들 앞에 고개를 못 들게 됐다. 학교 안에 있어서의 교장이나 교사들의 위신문제가 새삼 돋보이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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