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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이철호의 시시각각

우리도 이제 중심 좀 잡고 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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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지난 주말 한 종편TV가 낚였다. 중국 관세청 통계를 인용하며 “매달 5만여t이던 대북 원유 수출이 지난 1월 돌연 ‘0’이 됐다”고 흥분한 것이다. 장성택 처형과 리비아에 등장한 북한 유조선까지 들먹이며 북·중 갈등설을 제기했다. 사실이라면 대단한 뉴스다. 하지만 지난해 2월 로이터통신도 똑같이 낚였다. 한 달 뒤인 3월에 평소의 두 배인 10만6000t의 수출이 확인되면서 북·중 괴담은 쏙 사라졌다.

 연초 한 달씩 대북 원유 수출이 ‘0’으로 잡히는 수수께끼는 2007년 이후 연례행사가 됐다. 그 비밀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대북 송유관의 ‘정기 청소’라는 해석과 세관 통계에 안 잡히는 ‘무상 원유’가 넘어간다는 관측이 엇갈린다. 그만큼 중국의 통계나 정보는 종잡기 어렵다. 긴 흐름으로 봐야 대북 원유 수출이 해마다 꾸준히 증가해온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즘 서울시 간첩사건도 마찬가지다. 사건 원산지가 중국인 만큼 긴 호흡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당장 보수 쪽은 “간첩 여부가 본질”이라 버티고, 진보 쪽은 국정원의 서류조작을 파헤치는 데만 골몰한다. 진영 논리가 어김없이 도지면서 중간에 낀 국민은 헷갈릴 뿐이다. 이런 복잡한 사안일수록 진실에 다가서려면 단순화가 생명이다. ‘피 같은 내 돈’ 같은 단순한 잣대를 들이대는 게 도움이 된다.

 유우성은 그제 도심집회에서 “1000번을 물어도 나는 간첩이 아니다”고 했다. 그 전에 분명히 해둘 게 있다. 그는 화교이면서 탈북자로 위장해 정착 지원금 7700만원을 챙겼고, 서울시 공무원으로 수천만원을 받았다. 연세대를 다닐 때 학비는 어디서 나왔을까. 바로 우리가 낸 피 같은 세금이다. 검찰이 그를 기소하면서 공소시효 5년을 적용해 2500만원만 추징한 것은 잘못이다. 유씨는 우리 납세자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 공소시효 7년인 사기죄를 적용해 한 푼도 남김없이 받아내야 한다.

 국정원의 서류 위조도 마찬가지다. 자살을 기도한 김모씨의 구속은 당연하다. 납세자의 입장에선 ‘모해(謀害)증거인멸’보다 불량제품을 납품한 죄가 훨씬 크다. 그는 혈세 1000만원을 받고도 엉뚱하게 위조 서류를 넘겼다. 사기나 다름없다. 국정원이 모르고 위조서류를 받았다면 혈세만 축내는 무능한 조직이며, 알고도 받았다면 직무유기다. 더 이상 보수 진영도 국정원을 두둔할 일이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서류를 조작해 멀쩡한 생사람까지 간첩으로 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한심하기는 국회도 그러하다. 영국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와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하원(commons)은 국회의 뿌리다. 의회의 존재 이유가 납세자 보호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국정원을 편들고, 민주당은 유씨를 감싸기에 바쁘다. 여야가 납세자를 의식한다면 함께 손잡고 유씨와 국정원을 야단쳐도 부족하다. 둘 다 납세자의 호주머니를 터는 범죄를 저질렀다.

 유씨는 “(한국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다”고 희망했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간첩 혐의를 벗는다 해도 납세자들까지 면죄부를 준 게 아니다. ‘출입입입’이거나 ‘출입출입’이라는 출경기록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머니 제사 때문”이란 감상적 해명에 넘어갈 수도 없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사전 신고 없이 북한을 들락거렸다는 것이며, 진짜 탈북자라면 보안법 위반이다. 그는 그나마 화교라서 다행이다. 강제추방돼도 그에겐 돌아갈 조국, 중국이 있다. 주한 중국대사관도 이미 각별한 관심을 표시한 바 있다.

 거칠게 계산해도 유씨는 우리 납세자들로부터 1억원 이상을 뜯어갔다. 남북을 무시로 오가고, 영국 망명 신청 때는 또 다른 가명을 썼다. 이렇게 정체가 불분명한 그에게 추가로 돈을 댈 만큼 너그러운 납세자는 없다. 유씨가 서운하거나 억울한 점이 있다면 국정원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면 한다. 그 추가 비용에 비례해 납세자들은 국정원에 보다 가혹한 회초리를 들 각오가 돼 있다. 우리끼리 더 이상 물고 뜯으며 힘 뺄 이유는 없다. 우리 사회도 이제 중심 좀 잡고 살자.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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