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여공들 국수만 먹었어 … 전태일도 우리 단골이었지” “중국 때문에 고전 … 그래도 실력만큼은 우리가 최고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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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호 16면

●평화시장서 44년 … 모녀식당 변창순 사장
서울 을지로6가 평화시장은 길이만 600m가 넘는 길쭉한 3층 건물이다. 1962년 설립된 동대문에서 가장 큰 의류 상가다. 지금은 도소매 상점뿐이지만 처음엔 2층과 3층이 모두 봉제 공장이었다. 1970년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일터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가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 먹였던, 허리를 못 펴고 종일 미싱을 돌렸다는 여공들의 일터이기도 했다.

동대문시장을 지킨 터줏대감들

모녀식당 사장 변창순(66·사진)씨가 어머니와 평화시장에 들어온 건 68년, 그가 막 스무 살이 됐을 때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이 셋이었다. 처음 식당을 열었을 땐 메뉴가 세 가지였다. 국수는 20원, 라면은 30원, 백반은 50원. 여공들은 국수만 사 먹었다. “백반을 어떻게 사먹어. 그땐 월급 안 받고 일하는 애들도 많았어. 먹여주고 재워만 주면 일했다고.” 그는 전태일을 기억한다. 자주 들락날락했다고 한다. 평화시장에서 바보회가 결성된 게 69년. 변씨는 동갑내기인 전태일을 볼 때마다 “열심히 돈이나 벌지, 그런 일 고만하라”고 말했다 한다. “하루는 ‘내일모레면 다 결정 난다’고 하데. 그러더니 그냥 죽었어.”

지금 식당 메뉴는 네 가지다. 감자탕과 닭곰탕, 족발과 백숙. 고기 메뉴로 바뀐 건 동대문에 돈이 돌면서다. 70년 고속버스터미널이 을지로 6가에 들어서면서 전국 옷장수들이 동대문 도매시장을 찾았다. 정신없이 주문이 밀려들었다. 한때는 직원 예닐곱 명이 밥 먹을 새도 없이 배달을 다녔다. 경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 건 2000년대 들어서다. “가게가 너무 많이 생겨서 다들 돈 벌기가 힘들어. 주머니가 넉넉할 땐 일 끝나고 다들 술 한잔씩 했는데, 지금은 혼자 와서 밥만 먹고 가.” 요즘은 배달 직원을 두어 명 두고 남편과 변씨가 밤새 가게를 지킨다. 여든다섯이 된 어머니는 가게를 안 나온 지 꽤 됐다.

식당은 도매시장이 기지개를 켜는 밤 10시에 문을 열어 다음 날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 변씨는 주 6일 동안 밤을 꼬박 새우고 늦은 오후에 눈을 붙인다. “힘든 게 어딨어. 먹고 살려면.” 옛날 얘기를 할 때도, 요즘 얘기를 할 때도, 그는 입버릇처럼 이 말을 했다. 44년을 버티게 한 주문이었을 것이다. 이 주문에 기대 동생 셋과 자녀 셋을 키웠다. 옷 시장에서 종일 일하는 그는 얼마나 자주 옷을 살까. “옷 안 사. 일만 하는데 옷이 뭐가 필요해.” 작업복 조끼에 땡땡이 몸뻬 바지를 입은 그가 웃었다.

●봉제 37년, 유성사 이필호 사장
이필호(52·사진)씨의 봉제공장 유성사는 서울 창신동의 한 지하실에 있다. 영세 봉제공장이 2000개 이상 몰려 있는 봉제 골목이다. 90㎡ 남짓한 공간에 도급제 직원이 4명. 블라우스·바지·재킷 할 것 없이 만든다.

전남 광양 출신의 이씨는 1977년, 사촌 형을 따라 동대문에 왔다. 중학교 1학년을 채 마치지 못했다. 어리고 왜소해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웠다. “밥만 먹여달라”고 졸라 두어 달 월급 없이 일했다. 청계천5가 근처의 한 낡은 주택 안 공장이었다. 다락방에서 자고 밥을 해먹으며 일을 배웠다.

동대문 봉제 공장은 도제 시스템이 엄격했다. 한동안 ‘시다’로 불리는 보조 앞에 서서 실밥을 빼는 ‘시다 보조’로 일했다. 시다가 되고 1년여가 지나서야 가위를 잡았다. 그의 전공은 재단이다. 옷감을 다려 패턴을 놓고 자른 뒤 심을 붙이는 봉제 전 공정이다. “그때는 재단사가 끗발이 제일 셌어. 재단을 하려면 모든 걸 다 알아야하거든.” 그는 자랑스레 말한다.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전성기는 88 올림픽 전후다. 동네 양장점이 지고 기성복이 뜨던 때다. 어찌나 옷이 불티나게 팔렸는지, “바지에 발만 들어가면 팔린다”고들 했단다. 옷 시장 최대 대목인 명절을 앞두고는 타이밍이라는 각성제를 먹어가며 새벽 4시까지 일했다. 이때 다진 기반으로 90년대 중반, ‘내 공장’을 차렸다.

일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한 건 최근 5~6년 사이다. 중국제 옷이 동대문을 쓸기 시작했다. 그가 대량 주문을 받아 최대한 가격을 낮췄을 때 봉제 단가는 남방 한 장에 4000원 수준. 중국제는 옷값이 그 수준이다. 최근엔 더 무서운 경쟁 상대가 생겼다. 유니클로·자라 같은 패스트패션 업체다. “겨울 코트는 공임을 적어도 3만원은 받아야 되거든. 백화점 가면 유니클로 오리털 잠바가 비슷한 가격이잖아.” 그는 올겨울, 일주일에 반은 일하고 반은 놀았다.

그래도 그는 창신동 봉제 골목만의 경쟁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유행을 실시간 반영해 재고를 줄이는 ‘반응 생산(QR·Quick Response)’이 확산돼서다. “미리 만들어 놓는 건 중국도 잘하지만, 하루 이틀 만에 만들면 우리 품질 못 따라온다”고 말했다. 가장 큰 고민은 기술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없는 것. “기술자가 없어서 창신동이 쇠락할까 봐 걱정이지. 재킷 한 장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필요한지 알아요? 단추며 안감이며 심이며, 만들고 나르고 꿰고…. 동대문시장이 잘돼야 고용이 창출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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