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미시 세계사]비극의 땅 크림반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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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호 33면

16일은 크림 자치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해 러시아에 합류할지를 묻는 주민투표가 진행되는 날이다. 크림반도의 200만 주민은 러시아인 58%, 우크라이나인 24%, 크림 타타르인 12%로 이뤄졌다. 1954년 소련 중앙정부가 ‘우정의 선물’로 우크라이나에 넘기기 전에는 러시아 산하 자치공화국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간단히 인구 비율로 러시아 귀속 여부를 판단하기엔 너무도 복잡하고 기나긴 피의 사연이 숨어 있다.

크림반도는 러시아 혁명 이후 벌어진 적백내전에서 백군의 마지막 보루 중 하나였다. 1920년 말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백군과 지지 시민 5만 명이 항복하자 볼셰비키는 포로를 학살했다. 게다가 소련 건국 초기 볼가강 홍수 등으로 러시아에 흉년이 닥치자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대대적으로 징발했다. 그 결과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크라이나는 두 차례나 대기근을 겪었다. 1921~22년에는 굶주림과 관련 질병으로 우크라이나 등 소련 전역에서 500만여 명이 숨졌으며 32~33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만 75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후자는 ‘기근을 통한 민족 절멸’이라는 뜻의 ‘홀로도모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41년 10월 31일부터 42년 7월 4일까지 벌어진 세바스토폴 요새 포위전에서 11만8000여 명의 소련군은 독일군·이탈리아군·루마니아군·불가리아군·크로아티아군 등 추축군 20만 명의 발목을 250일간 붙잡았다. 독일군의 무시무시한 포격과 폭격으로 소련군 1만8000명이 전사하고 대부분 부상병인 9만5000명이 항복했지만 추축군도 2만 명 이상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후방인 세바스토폴 점령이 늦어지면서 전방에서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42년 8월~43년 2월)의 개시가 지연돼 결과적으로 소련군 승리에 기여했다는 평이다.

세비스토폴은 스탈린그라드·레닌그라드·키예프·모스크바 등과 함께 ‘영웅도시’ 칭호를 받은 13개 도시에 포함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000년 수비병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러시아 정부는 처절한 투혼을 기리는 영화를 만들어 수비병들을 영웅시했으며 항복했다는 이유로 소련 시절 홀대받았던 참전 군인들에게 뒤늦게 훈장을 주고 명예를 회복시켰다. 러시아가 크림반도에 집착하는 이유의 하나다.

더 큰 비극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44년 크림반도를 탈환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군이 조직한 반공·반소 타타르 부대에 9000여 명이 합류했다는 이유로 크림 타타르 민족 전체를 적으로 돌렸다. 상당수가 붉은 군대에서 싸우고 빨치산 활동을 벌였어도 소용 없었다. 44년 5월 고향에 살던 크림 타타르인 19만3865명 전원이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러시아 오지 등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들은 이주 명령을 전달받은 지 30분 안에 간단한 개인 소지품만 소지한 채 가축수송 열차에 실려 짐승처럼 옮겨졌다.

붉은 군대에서 복무하던 크림 타타르인도 쫓겨나 시베리아 등지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23만8500여 명에 이른다. 소련 정보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전체의 46.2%인 10만9956명이 목숨을 잃었다. 크림 타타르인들은 이를 ‘추방’이라는 뜻의 ‘쇠르귄’이라고 부른다. 1937년 연해주 등 극동지역에 살던 한국인 17만1781명을 중앙아시아의 황야에 강제 이주시킨 것과 같은 잔혹한 방식이었다. 이들이 러시아를 보는 눈이 여전히 곱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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