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케인스냐 하이에크냐, 꼭 한 명만 골라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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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하이에크(왼쪽)와 케인스는 1930년대 대공황 시대에 불황의 해법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국가 개입(케인스)이냐, 시장 자유(하이에크)냐’를 놓고 겨룬 둘의 논쟁은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아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공황 시대 일자리를 찾아나선 노동자들의 액자 사진 앞에 두 사람을 배치해 합성한 장면. [사진 부키, 중앙포토]

케인스 하이에크
니컬러스 웝숏 지음
김홍식 옮김, 부키
632쪽, 2만 5000원

애덤 스미스, 칼 마르크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서로 격렬히 충돌하면서도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우리의 삶과 현실에 압도적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인물이란 점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들 죽은 경제학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들 거장 중에서 현재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라면 단연 케인스와 하이에크다.

 지난해 11월 국회에서의 문형표 복지부 장관 인사청문회. 민주당 김용익 의원이 “당신은 케인스와 하이에크 중에 누구를 더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문 장관은 “케인스”라 했다. 김 의원은 “입으로는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하이에크를 따라가는 것 아니냐”고 압박했다. 문 장관의 시장주의적 사고를 비판한 것이다. 당연히 정부 지출로 복지를 챙겨야 하는 복지부 장관이 하이에크 노선에 따르기는 어렵다.

 케인스는 실업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강조했다. 하이에크는 정부 간섭을 비판하고 자유시장을 내세우며 그와 대척점에 섰다. 이 두 걸출한 천재는 지금 단순한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들의 이론과 사상은 정치와 이념을 구분 짓는 잣대가 돼 버렸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에 따라 진보와 보수가 나뉘고, 미국에선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갈라진다. 누구의 노선을 추종하느냐에 따라 세계 각국의 정치 지형도가 새로 그려진다.

 이 책은 세계 경제와 정치판에서 맹위를 떨치는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함께 등장시킨다. 그동안 각각 따로 다룬 책은 많았지만, 두 사람의 이론과 대립관계를 입체적으로 풀어나간 경우는 흔치 않다. 저자는 언론인 출신답게 흥미진진한 전개로 두 사람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두 천재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으면서 구체적인 사료와 증언을 통해 경기침체와 인플레, 대량실업에 맞서는 그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저자가 끝까지 중립적 입장을 지키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하이에크(왼쪽)와 케인스 캐리커쳐.

 책은 연대기 순으로 두 천재의 굴곡을 비교한다. 큰 그림으로 보면 ①대공황 ②1950~60년대 케인스주의 황금시대 ③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통화주의 대두 ④1990년대 하이에크 귀환과 신자유주의 확산 ⑤2007년 서브프라임 사태와 케인스주의 복귀로 나눠진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대량실업·인플레·금융위기 등이 변곡점으로 작용하면서 두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음을 알 수 있다.

 하이에크는 2차 대전 중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케인스와 함께 보낸 장면을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만나면 보통 경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같은 의견일 수 없다는 데서야 의견일치를 봤다.” 그들은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하게 싸웠다. 여기에서 음미해볼 대목은 저자가 그들의 삶의 배경을 더듬어가는 장면이다. 1차 대전 직후 영국의 대량실업을 목격한 케인스는 실업 해결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게 당연했다. 오스트리아의 엄청난 인플레를 경험한 하이에크는 ‘물가상승’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했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결코 빈말이 아니다. 두 사람의 이론은 서로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대가(大家)들은 원래 이론(異論)의 여지를 열어 놓는 법이다. 하이에크는 자유시장을 강조하면서도 무정부를 옹호하진 않았다. “경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정부의 개입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케인스는 정부 개입을 중시하면서 거시경제학이란 새 영역을 통째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시장의 기능을 부인한 적은 없다. 케인스는 하이에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유시장과 정부 개입 사이에서) 자네와 내가 그을 선이 아마 서로 다른 지점일 걸세”라고 썼다.

 두 사람의 간극은 오히려 열정적인 후예들에 의해 더욱 벌어졌다. 1946년 케인스가 숨을 거두고 혼합경제가 줄기차게 성공하면서 그의 『일반이론』은 30여 년간 복음서로 떠받들어졌다. 이에 비해 보수주의자들은 그를 “시장을 파괴하려는 ‘빨갱이’”라 비난했다. 보수파의 총아인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은 하이에크의 저작들을 신줏단지처럼 여겼다. 공개적으로 그에게 존경심을 표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조연은 ‘통화주의’의 대표인 미 시카고 대학의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는 여전히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로 군림하고 있다. 프리드먼은 경제학에선 케인스에 더 가까웠고, 정치적인 면에선 하이에크와 더 가까운 인물이다. 프리드먼을 참고한다면, 정치적 프리즘으로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함부로 왜곡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하이에크가 시장을 수호했다면, 케인스는 지난 80년간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를 두 번(대공황과 2007년 금융위기)이나 구원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수혜층인 보수파는 그를 극도로 미워한다. 그렇다고 보수파들이 추앙하는 하이에크는 무덤 속에서 환호할까? 아니다. 그는 “보수주의는 변화를 두려워하며, 새로운 것을 주저하고 불신한다”며 “나는 자유주의자”라고 선을 그었다.

 오늘도 양쪽 진영은 대립한다. 거시경제도 미시적 시장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견해(신자유주의)와 거시경제는 미시적 시장의 총합 그 이상이다는 견해(케인스주의)가 맞부딪히고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상대방을 삿대질할 일이 아니다. 오늘날 양쪽 진영은 서로 접점을 찾아 침윤(浸潤)하는 것이 대세다. 금융위기가 닥치면 신자유자의자도 정부와 중앙은행의 개입을 인정한다. 또한 케인스주의가 시장을 말살하고 모든 경제행위를 통제할 것이란 난독증도 사라졌다. 결국 경제상황에 따라 자유시장과 정부개입의 적절한 조화가 남은 숙제다. 이 책도 ‘승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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