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전국학연<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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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상경 후 최초로 내가 부닥친 정치적 좌우익의 대결 사건은 9월5일 풍문여고에서「조선학병동맹」야간회의.
그날 밤에는 비조차 부슬부슬 내렸다.
주최측은「건준」을 지지하고 명일로 선포될「인민공화국」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성명을 결의하자고 주장했다.
학병동맹은 9월1일, 이미 내가 귀국하여 상경하기 전에 조직되어 있었다.
일군에서 귀환한 학병들은 9월1일 한청「빌딩」에 모여『학병전우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견고한 단결로 제국주의 세력을 철저히 구축하며 민족해방의 완전을 기할 것』을 강령으로 채택하고 학병동맹을 결성했다. 주동인물은 왕익권(위원장) 이춘영(부위원장) 이형태(총무부) 고인권(선전부) 박진동(실천부) 박 혁(문학부) 김근배(경리부)등.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조선학병동맹」은 발족목적과는 달리 이미「조선학도대」의 경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공산당의 지령에 의해서 완전히 조종되고 있는 별동 부대가 되어버렸다.
나는 당시에는 학병동맹이 어떠한 단체인지 채 간파하기도 전이지만 학병이란 애증이 교차되는 이름에 끌려 엉겁결에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날 밤 회의장에 나와 같은 보전출신의 오세정·박석규·김종회·황석규·손광수 등 학병동지와 같이 참석했다.
회의는 왕익권·이춘영 등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갔다.
그들은 우리 나라가 자주독립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소련이나 미군이 우리 나라에 진주해오기 전에 우리 나라 지도자가 총망라되어있는「건준」이 산파한「인민공화국」을 지지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그들은 학병동지들의 친목을 도모하겠다고 결성한 동기와는 달리 정치적인 입장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미군이 9월7일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는 정보를 듣고 부랴부랴 서둘러 모임을 강행한 것이었다.
나는 회의장의 분위기에서 한동안 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을 느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갈일성으로『의장, 발언권을 주시오』라며 발언권을 얻고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연한 나의 행동에 소란했던 장내분위기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장내의 온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입을 열었다.
『죽음의 싸움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우리학병동지들이 해방된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학병동자들이 채 귀환을 못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극소수의 학병 동지가 전체학병의 이름을 빌어 정체불명의「인민공화국」수립을 지지 결의한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노릇이다.』
말이 여기에 이르자 장내는 갑자기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좌익계의 조종을 받는 가짜 학병들이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다.
『집어치워라!』
『반동분자 ×××』
『의장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나는 장내의 소란과 야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쳤다.
『친목단체는 부편부당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끝까지 말을 마치고 단위를 내려오자 한쪽에서는 겁에 질려 주위 눈치를 살피면서도 몇몇 사람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순간 한쪽에서『의장! 의사진행이오』라고 외치면서 한사람이 단위로 올라갔다. 그는 민주주의 원리를 들고 나왔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칙에 복종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이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역이다.
이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토론은 이것으로 종결짓고 표결로 들어가자』고 했다.
우리 일행은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결의에 불복한다고 선언하면서 퇴장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회의장을 뛰쳐나올 때 김종회 동지(사망·제2대 국회국방위원장)는 권총을 찬 좌익학병이 나에게「테러」를 하려고 하는 눈치를 보였다고 했다.
그날 밤은 공산당과의 대결에 있어서 조직적이고 선동적인 대응책을 취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산 교훈으로 체험했다.
공산당은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을 가장하여 맷돌을 돌리듯 적을 교란시키는「선마타권식전법 (선마타권식전법)을 신축자재하게 구사한다지 않는가? 그들은 학병동지들의 친목까지 빙자하여 단체를 만들고 이것을 그들의 적화전략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로 목격한 셈이다.
순수했던 우익학병동지들은 12월16일 안동준·김근배·박성화·김학천·김완용 등이 주동이 되어 새 학병단을 결성하였고 대부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국군창설의 주역들이 되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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