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의 트렌드 노트] '열 손가락 반지' 유행 … 남자들 큰일 났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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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학가에 떠돌던 유머가 있다. 여학생이 반지를 어느 손가락에 끼었나를 보면 그녀의 연애상태를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새끼손가락에 끼면 ‘메이 터치(may touch)’, 약지는 ‘돈 터치(don’t tuch)’, 중지는 ‘네버 터치(never touch)’, 검지는 ‘플리즈 터치(please touch)’, 엄지에 끼면 ‘아이 윌 터치(I will touch)’를 의미한다는 내용이다. 보통 약혼반지는 약지에, 결혼반지는 중지에 낀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얘기다. 그렇다면 열 손가락에 반지를 낀 여자는?

화이트 데이, 남성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사탕과 선물로 마음을 전한다는 날이다. 일단 여성은 사탕보다 초콜릿을 좋아한다. 그리고 초콜릿보다 반지 선물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큰일 났다. 남자들, 지갑 꽤나 털릴 것 같다. 요즘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건 열 손가락 모두에 반지를 끼는 일명 ‘열 손가락 반지’다.

배우 전지현이 몰고 온 ‘천송이 효과’ 중 하나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는 열 손가락 마디마다 가는 실반지를 끼고 등장했다. 왜? 어느 인터뷰에서 전지현이 직접 이 질문에 대답했다. “내 손가락은 모두 소중하니까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뉴욕의 명품 백화점 버그도프 굿맨에 입점해 상류층과 연예인, 예술인 등을 주 고객층으로 둔 주얼리 디자이너 샐리 손은 “전 세계적으로 보디워크가 유행하면서 몸으로 말하는 게 트렌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문신이 아트의 단계로 접어들만큼 ‘내 몸 구석구석이 모두 나를 표현하는 도구’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며 “특히 젊은이들은 몸의 작은 부분까지 표정 담기를 좋아하고 그 시간을 즐기기 때문에 네일 아트와 반지 여러 개 끼기가 유행”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여성은 남성보다 대화 시 손동작이 유난히 많다. 전지현을 광고 모델로 내세운 액세서리 브랜드 디디에 두보 역시 2014년 광고 컨셉트를 잡으면서 전지현이 긴 머리를 자주 쓸어 올리고 섬세한 손동작이 많은 습관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 점을 ‘열 손가락이 모두 중요하다’는 브랜드 컨셉트와 접목한 것이 바로 ‘천송이 열 손가락 반지’다. 전지현 광고가 시작되고 방송에 노출된 시기는 1월 첫 주. 디디에 두보의 1월 매출은 바로 전달인 12월 대비 100% 성장했다. 아예 대놓고 ‘천송이 열 손가락 반지’를 찾는 고객들 때문에 10개의 반지를 세트로 묶은 패키지 상품(350만원)도 판매하고 있다.

열 손가락 반지의 유행을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힙합·펑크 문화와 세련되게 정제된 하이패션 스타일의 접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트렌드 전문가 그룹인 인터패션플래닝의 황선아 수석연구원은 “여성 패션이 미니멀리즘(단순한 형태를 지향하는)의 영향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액세서리는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헐렁한 청바지에 티셔츠, 검정 모자, 흰 운동화가 전부인 남성 힙합 가수들이 손가락에는 해골, 십자가, 꽃, 체인 등을 섬세하게 조각한 시크한 디자인의 반지를 여러 개 끼는 것과 같은 심리라는 얘기다.

‘열 손가락 반지’ 열풍에 한 몫 한 빅뱅의 지드래곤(이하 GD)이 그 예다. GD는 액세서리 브랜드 제이에스티나 맨즈 컬렉션 광고 모델이다. 제이에스티나 마케팅팀 송지원 본부장은 “잡지에 광고가 노출된 1월 말부터 매출이 2.5배 상승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건 ‘GD 반지’를 찾는 고객들 중 절반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패셔니스타인 GD의 시크한 중성적 이미지를 원하는 여성 고객들이다. 송 본부장은 “이 점을 미리 간파해서 남성 컬렉션이지만 남성용과 여성용 두 가지 사이즈의 반지를 준비했고 이 전략이 적중했다”고 설명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이끌고 있는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내놓은 ‘트렌드 코리아 2014’의 키워드 중엔 ‘몸이 답이다’라는 대목이 있다. 현대인들이 몸을 직접 움직여 땀 흘리며 얻는 성취감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이 대목을 액세서리 트렌드에 대입해 보면 이젠 명품 가방 하나를 팔에 끼고 남들이 알아서 봐주기를 기다리는 시대는 갔다는 얘기로 이해된다. 얇은 실 반지에서 브랜드 로고를 찾기는 어렵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명품 로고 대신 취향에 맞는 디자인의 실반지를 여러 개 착용하는 것으로 ‘개성’을 뽐내기 시작했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가장 많이 움직이는 것이 입 근육 다음으로 손가락이다. 그렇다면 안 보이는 로고 하나보다 꼼꼼하게 치장된 열 손가락이 나를 표현하는 데 더 효과적인 스타일 전략이다.

참고로, 오래 전부터 서양에서 전해 내려오는 손가락 반지의 의미는 위 대학가 유머와는 아주 다르다. 엄지에 끼는 반지는 ‘자신감’, 검지는 ‘리더십’, 중지는 ‘성공’, 약지는 ‘사랑’, 새끼손가락은 ‘관능’이다.

서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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