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5)|전국학련<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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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병영①>
1944년 1월22일, 부산항을 떠나 밤새 현해탄을 건너온 「공고오마루」(김강환)는 다음날인 23일 새벽녘에야 일본땅 「시모노세끼」(하관)에 도착했다.
음산하게 추운 부두는 반도에서 온 학병을 환영하는 나팔소리·호각소리로 가득찼다.
우리는 드디어 일본땅에 발을 올려 놓았다. 팽팽한 긴장을 느꼈다. 줄지어 배에서 내린 우리는 미리 정해진 인솔책임자에게 넘겨졌다.
인솔책임자는 「쇼오와군죠」 (소화군조)라 했다. 그는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 자기의 명령을 엄수하라고 서슬시퍼렇게 지시한 다음 우리 일행 4백여명을 「트럭」에 분승시키더니 하관역으로 데리고 갔다.
남방으로 배속될 학병들은 부두에 그대로 남았다. 일본 본토안에 배속될 우리들은 하관역에서 동경행 열차를 탔다.
열차가 「히로시마」(광도) 「오까야마」(강산) 「히메지」(희노)역을 지날때마다 40명내지 50명씩의 학병들을 내려 놓았다.
우리는 「오오사까」(대판)에서 내렸다. 하늘조차 검푸르고 습기찬 오후, 우리는 전철로 바꿔타고 「사까이시·가나오까」(계시금강)로 갔다. 이곳에 떨어진 조선학병은 42명, 소속은 중부제31부대였다.
부대에 도착한 우리는 중대장 「니시무라」(서촌)의 일장연설을 듣고 곧 내무반으로 안내됐다. 언제 연락이 되었는지 내무반 침상에는 벌써 우리들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창씨개명을 하지않은 내 이름은 유별나게 눈에 띄었다. 「리·니또오헤이」(이2등병)-.
나는 이철승아닌 「리·니또오헤이」가 된 것이다.
우리 부대는 「시쬬오다이」 (치중대)라 하여 요샛말로 병참부대와 비슷했다.
말 「구루마」에 짐을 실어나르는 「밤바항」 (만마반), 말등에 짐을 싣고 산을 오르내리는 「다바항」 (대마반), 그리고 「지도오샤항」 (자동차반) 셋으로 편성돼 있는 부대였다.
나는 만마반이었다.
우선 6개월간의 신병훈련이 시작됐다. 제식훈련을 비롯해 총검술, 수류탄 던지기, 가마니에 짐 퍼나르기, 들어올리기, 제1포복, 제2포복등 많은 종목의 훈련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훈련은 말타기와 말 다루기. 나에게 배당된 말은 「기다도미」 (배부)라는 이름의 성질이 사나운 신마였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기다도미」에 여물과 물을 먹이고 말등이 번쩍번쩍 윤이 나도록 손질을 해야했다.
말발굽은 물론 말 궁둥이까지 윤이 나도록 소제하지 않으면 안됐다. 세상에서 못할일이 말궁둥이 닦는 일. 더 고약한 일은 길이 1.5cm∼2cm규격의 말여물 썰기.
쉽게 잘못 썰어 놓으면 기합이 대단했다.
말은 상전중의 상전. 그래서 말이 아니라 숫제 「말님」이었다. 미군기의 공습이 있을 때에도 「말님」부터 대피시키고 그 다음에야 사람이 대피했다. 말님 때문에 당한 고초는 컸다. 훈련중에 한길씩이나 뛰는 것은 물론이고 갑자기 급선회하여 마굿간으로 달려가 버리는일이 비일비재했다.
성격은 사납고 힘은 세어 느닷없이 돌진하면 나는 도리없이 낙마했다.
그러나 말이 다치면 당하는 고초가 더 컸다.
언제인가 장애물 훈련 때 말이 장애물을 뛰어넘지 못하고 걸려 무릎을 꿇고 뼈가삔 사건이 일어났다. 위에 타고있던 나는 낙마해서 실신해 버렸다.
그래서 김태규군 (현국회의원·유정회)과 일본인 학병에의해 담가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갔고 약1주일이 지난뒤 퇴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기합이 기다렸다. 말징을 박는 제철병들이 징을 박는 쇠뭉치로 내 어깨를 두들겨 패는 것이 아닌가.
내몸이 무거워 말이 무릎을 꿇었다는 구타이유가 들어졌다.
말에는 여물에 콩깻묵을 섞어 먹였으나 절대로 훈련병에게는 콩깻묵조차 입에 못대게하던 그 시절-.
뒤에 김군으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담가에 실려가던 나의훈련복 주머니에서는 말을 먹이는 콩깻묵 뭉텅이가 쏟아져 나와 당시 일본인 몰래 콩깻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우리 학병들의 훈련단면이 노출됐다.
중대소속 「말님」의 존함(?)을 모두 외는 일도 힘들었다.
「기다도미」(배부) 「기다까제」(배풍)등 엇비슷한 이름을 잘못 외어 더듬 거리면 두말 없이 말채찍이 날아왔다.
『조선놈의 새끼, 그것도 몰라.』이렇게 욕하며 말재갈이나 고삐로 내려쳤다. 나는 조선인학병 중에서도 유난히 체구가 크고 성품이 빳빳해서인지 걸핏하면 기합을 받았다.
당시 일본본토박이들의 체구는 요즘보다 왜소했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되고 건강한 내체구에는 옷이나 신발이 항상 「특대」라야 했다. 일인등은 이것을 트집잡았다. 『넌 왜 그리덩치가 크냐, 옷에 네 몸을 맞추란 말야!』 이러면서 두들겨 팼다.
두들겨맞는것 보다 견디기 어려운것은 배고픔-. 그때 규정에 몸무게가 72kg만 넘으면 2인분 식사를 주었으므로 나는 몸무게를 늘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입영당시 71kg나가던 내 몸은 나날이 줄어들어 65kg까지 빠지는게 아닌가. 안타깝기만 했다. 나는 궁리끝에 고참병들이 먹다 남은 밥그릇을 골라 설겆이를 하면서 몰래 훔쳐먹기로 했다. 그래서 여러차례 훔쳐먹었다.
이 사실을 안 일인 고참병들은 먹다남은 밥그릇에 물을부어 버리거나 담배꽁초를 문질러 버렸지만 허기진 우리들은 그것이라도 다시 물에씻어 훌쩍 마시곤 했다.
일요일엔 더욱 배가 고팠다. 일요일엔 훈련이 없다는 핑계로 정량급식을 주지않고 빵 몇조각만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인학병들은 가족면회라도 있기만 조선학병들은 올데갈데 없이 내무반에 박혀 관물을 정리하거나 밀린 내복 세탁이나 해야했으니 그 울분, 그 괴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무렵 전주에 있는 외4촌동생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훈련복을 입은 사진을 동봉해서-.
『보아라, 형을!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이지만 초년고생은 돈을 주고도 못산다기에 이를 악물며 견뎌가고 있다. 나는 꼭 살아 돌아갈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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