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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맞은 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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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자의 고형을 뜯어보면 때때로 의외의 일들이 숨어 있다.「가르칠 교」자도 그 기원은 별로 고상하지 못하다.「아이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한다」는 뜻의 글자들이 모여「구」라는 회의 문자가 되었다. 이른바「교편」이라는 말도「교사로서 수업하는 일」이라는 의미를 갖기 전엔 회초리를 뜻했다.
동양인의 감각으로는 교사가 가부장의 역할까지도 대신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의 아이를 때리면서까지 가르칠 수 있는 권능이 바로 그런 경우다.
학부형의 편에서도 교육을 위해 휘두른 회초리라면 원망스러울 것이 없다. 교육은 실상 엄격한 절도 위에서 이루어져야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문제는 결코 아니다.
서양에서도 교사에 대한 존경심은 어디 못지 않다. 영국에선 국회의원에게 인사하는 시민은 드물어도 판사와 교사에겐 누구나 깍듯이 인사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프랑스」작가「알퐁스·도데」의『마지막 수업』이라는「콩트」를 보아도 선생에 대한 학부형들의 존경심은 대단하다. 그것은「아멜」선생의 품위에 앞서 교사에게 표시하는 시민의 자연스러운 태도인 것이다. 거꾸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시민들의 그와 같은 존경심이 바로「아멜」과 같은 훌륭한 교사를 만들어 낸다고도 볼 수 있다. 교사를 존경할 줄 모르는 사회는 존경받을만한 교사를 가질 자격도 없는 것이다.
영국작가「제임즈·힐튼」의 소설『굿바이·미스터·칩스』에서도 그 주인공인 교사는 유망하지도 않고, 유별나게 훌륭한 인격자도 아니다. 오히려 교장이 못되는 것을 끝내 한으로 생각하는,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그에 대한 존경과 흠모는 대단하다.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곧잘 골려주곤 하지만, 그것은 마치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감정의 연속같은 것이다.
최근 지방의 어느 학교에서 한 어머니가 딸의 학교성적에 불만을 품고 여교사에게 폭행을 가했다는「뉴스」가 있었다. 그 상황에 대한 이해에 앞서 그런 세상 풍정에 새삼 깊은 충격을 받게 된다. 필경 학교성적은 교육의 효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슨 흥정이나 거래의 소산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물정인 것도 같다.
그것은 교사만의, 또는 학부형만의 책임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이른바 부조리의 한 단면이다. 교사도, 학부모에게도 공동의 양심과 허물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교사에게 회초리를 들려주고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사회는 교사와 학부무가 함께 만들어야 할 것이다.「존경할만한 교사」와「존경할만한 학부형」은 마치 계란과 닭의 관계처럼 시작과 끝이 없는 한 울타리의 문제인 것 같다. 교권이란 그런 가운데 비로소 확고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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