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00)|전국학연(12)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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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주북중시절-. 지리와 역사를 담당한「노다」(야전)라는 일본인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공키 위해 일으킨 1939년의 노구교사건 때 부상당한 상이용사임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만주에서 중국인과 우리 한인을 학살한 것이 그의 유일한 무용담.
우리는 그를 미워했다.
그가 조회 때 연단에 올라서면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우우』하며 야유를 보내곤 했다.
나는 특히 그를 미워했다. 그도 나를 유별나게 미워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창씨 개명조차 하지 않은 터에 일본인 학생만을 골라 패는 것이 예사기 때문이다. 내가 일본인 학행을 두들겨 패는 것은 학생들간에 무용을 보여주어 학생대장이 되는 방법도 됐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나를 처벌할 핑계를 찾고 있다가 마침내 그 기회를 포착했다.
지리시간이었다. 그가 교실로 막 들어서자 우리들은 예의『우우』소리를 질러댔다. 요전 날 「노다」가 우리 하급생들한테「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 같다고 했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들은 그를 면박주기 위해 벼르고 있던 터였다.
내 옆자리의 송경선군(현재 전주 송외과원장)의 소리가 유별나게 컸다.
그러자「노다」는 목검을 추켜들고 학생 자리로 쫓아와 송군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노다」를 불끈 쳐들었다가 교실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네놈들의「가나」는 뭣이냐.』버럭 소리까지 질렸다.
교실은 발칵 뒤집혔다. 옆 반 선생이 쫓아오고 교장선생이 뛰어오는 등 온통 난리가 났다.
나는 급우들이 떠밀어내다시피 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퇴학을 면할 도리가 없게 됐다. 조선인학생이 서슬 퍼런 일본인선생에게 완력을 가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우리 담임인「야마다」(산전)선생과 당시「국어」인 일어담당의 정학모 선생이 내 입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야마다」선생은 훈육 주임이며 담임인데다 내가 주장으로 있는 농구부 지도교사. 그는 그렇다 치더라도 평소 말이 없고 걸을 때에도 하늘만 쳐다보아 학생들로부터 거의「이인」 취급을 받던 정 선생이 나를 변호하고 나선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선생은 경성제대 조선어과 출신의 수재로 조선어학회사건에 관련을 갖는 등 당당한 전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어학회사건에서 다튼 동지들은 투옥되고 자기만 풀려 나온 것을 늘 부끄러이 여기고 술로 세월을 보낸 분이다.
그는 또 무슨 옷이든지 한번 입으면 다 떨어질 때까지 절대로 벗지 않는(심지어 잠자리에서까지도)괴팍한 성품이어서 학생들로부터 폐인취급을 당했다.
그런 정 선생이 내 징계문제에 발벗고 나선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 선생은 나의 퇴학문제를 거론한 교무회의에서『철승이를 퇴학시킬 것이 아니라「노다」선생을 먼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인 학생 앞에서 조선어를 욕한 것은 교육자의 본분이 아니며 일본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자기 나라 말을 욕하는데 젊은 학생이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이렇게 일장연설을 해서 선생들이 모두 놀랐고 그 말을 전해들은 우리들도 깜짝 놀랐다.
나의 퇴학 결정문제가 다음교무회의로 미루어지자 이번엔 우리 반 50명 전원이 들고 일어섰다.
『철승이를 만일 퇴학시키면 우리들도 전원 자퇴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이 사실을 학교당국에 통고했다.
당시 전주북중은 상급생이 되면 진학 반과 취직 반으로 나누어졌고 우리 반은 진학 반이었다.
그래서 만일 우리 반 학생들이 자퇴하여 상급학교에 합격자를 내지 못하면 관립학교의체면은 말이 아니게됐다.
사태가 이쯤 되자 학교당국은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선처하는 도리밖에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퇴학에서 무기정학으로 감형해 주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만일「야마다」선생과 정 선생의 변호가 없었던들, 그리고 우리 반 학우들의 우정 어린 결의가 아니었더라면 내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기정학은 졸업 두 달 전에야 해제됐다. 당장 시험공부가 급박했다.
더욱 큰 일은 어느 학교에 진학하느냐의 문제.
나는 그때 일본 후생성직영의「체육전문학교」로부터 특기생으로 오라는 통지를 받고있었지만 숙부는 만류했다.
내 성격이나 체질에 동경체육전문에 가면 필시 부랑자가 되거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형무소 갈 것이 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숙부는 애국자들이 사학에 많이 몰려 있으니 보성전문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당시만 해도 관존민비사상이 뿌리깊었던 때여서 사학인 보전은 주가가 높지 못했다. 난감했다.
숙부는 서울출입이 잦아 세상물정에 환한데다 김성수·전진한·변희용(박순천여사 부군)함상훈 등 쟁쟁한 인사들과 친교가 두터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권유하는 말씀이 분명했다. 그래서 이를 거역키도 어렵고 그렇다고 사립에 가자니 어쩐지 허전했다.
나는 며칠을 두고 고민하다가 드디어 보전에 갈 것을 결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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