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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 때문에 예의와 염치가 너무 없어졌다-이희승<국문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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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물질만능이 인간성 파괴>
요즘의 우리 현실은 전통적인 윤리·도덕관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주체성은 망각된 채 방향 없이 비틀거리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같은 현상을 보이는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가장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은 서구사상에 대한 무분별한 도취일 것이다.
근세에 와서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란 말이 유행되고 있지만 이것은 서구사상으로서 「니체」도 『힘은 곧 정의다』라고 말한 일이 있는 것처럼 힘의 철학을 찬양한데 그 바탕을 두고 있다. 힘은 왜 필요한가. 그것은 물질을 획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힘은 물질만능주의의 수단이다.
물질만능이 미만한 서구문명은 인간의 정신을 소홀하게 하고 인간의 가치를 붕괴시켰는데 이 같은 사상이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 사회에 흘러들어옴으로써 도덕적 타락은 서구사회 이상으로 심한 양상을 띠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택시」운전사를 죽이고 기천원을 강탈한 20대의 흉악범을 예로 든다면, 그에게 있어서의 인간의 가치란 기천원짜리에 불과한 것이다.

<기성세대에 오염 더 심해>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이 같은 의식구조가 사회의 밑바닥으로부터 거슬러 올라온 것이 아니라, 지도층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시작돼 사회전체에 만연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도 범죄행위란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물욕에 최소한의 예의와 염치가 뒤따랐었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예의나 염치 같은 것은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것은 지도층의 부패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기업체는 망해도 기업주는 흥한다』는 유행어는 그들의 욕심이 얼마나 염치없는 욕심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학원 안 학우끼리도 불신>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자라는 젊은 세대들이 『물질만 획득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들에게 예의와 염치를 갖도록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요즘 학생들은 『원리원칙대로 해서는 안된다』 『정직은 바보다』따위의 말들을 즐겨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진원지는 어디인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학원이라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믿음과 사랑이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학우는 형제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 학우, 혹은 스승을 동기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로 믿을 수 없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욺은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이러한 현상을 생각할 때 몸서리가 쳐지고 잠조차 이룰 수 없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동양의 정신」이 해독제>
이러한 풍조를 없애기 위해 미력한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해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그것은 오직 지도층의 양심적인 정신자세로부터의 출발이 이루어질 때만 가능하다.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지나친 물질문명으로 고민하고 있다. 인간은 마침내 과학문명의 종으로 전락했으며 모든 인간들은 물질획득에 혈안이 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고칠 수 있는 것은 힘도 아니고 법도 아니다. 최근 서양에서는 서구 물질 문명의 중독상태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공자·석가와 같은 동양의 정신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거니와,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그 같은 우수한 동양의 정신문명을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고 언제까지나 서구물질문명의 영향 속에서 발버둥질 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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