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보충수업 시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공납금 인상과 관련하여 중·고교에서 실시하는 보충수업 문제가 새삼 세인의 구설에 오르고 있다. 교사들에 대한 처우개선비 염출책에 고민하던 문교부가 그 교육책으로 이른바 보충수업비와 학교육성회비를 통합, 인상된 액수를 일률적으로 징수케 함으로써 빚어진 낯 간지러운 학원 부조리 현상의 노현이라고 하겠다.
종래 2, 3학년 학생 중 희망자에게만 국한했던 보충수업을 본인의 희망여부나 주야간의 구별 없이 전교생에게 강요하는 결과를 초래한 이번 처사에 대해 일부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은 물론 일리가 없지 않다. 「보충수업」이란 이름의 연장수업을 전혀 필요로 느끼지 않거나, 그렇지 않아도 학비부담의 중하에 시달려오던 일부 학부모들이 오직 공납금 인상의 구실로만 악용되고 있는 이른바 보충수업 문제에 대해 불만을 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도시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보충수업이 꼭 필요한 것이며, 또 그런 보충수업을 위하여 따로 보충수업비라는 명목의 잡부금을 거두는 것이 옳은 일이냐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본래부터 『노』였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일률적인 보충수업이라면 이는 수업시간의 전반적인 연장은 될망정, 결코 보충수업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또 특히 이를 빙자하여 별도의 금품을 징수할 명분은 결코 떳떳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란 「사랑」과 마찬가지로 본질상 한계를 그을 수 없는 숭고한 인간행위다.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 진정한 남녀간의 사랑에 한계가 있을 수 없듯이, 스승의 제자에 대한 가르침의 행위는 본질상 한계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가 가르친 제자의 지적·도덕적 미숙에 대해서 자진해서 지도하고, 계발하는 스승의 행위에 대해 선을 그어놓고, 어떤 한계 이상의 행위에 대해서는 약삭빠르게 별도의 보수를 요구하는 것처럼 비교육적·비도덕적인 처사도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 같은 고육지책을 색출해낼 수밖에 없었던 문교당국의 고충을 전혀 이해치 못할 바도 아니며, 또 종래의 보충수업이 거둔 교육적 성과의 긍정적 측면을 전적으로 부인하려는 것도 아니다. 무시험 추첨제의 실시이후 조성된 여러 문제 상황 가운데서, 전반적으로 낮아진 학생들의 학력수준을 향상시키고, 흔히 풍기문제 등을 일으키기 쉬운 학관 등에서의 과외수업사태를 막는데 있어 학교 안에서의 보충수업제는 그런대로 상당한 교육적 효용을 인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충수업 문제와 관련된 모든 시비를 근원적으로 바로 잡기 위해서는 이나라 교육계 전체가 오랫동안 젖어온 고식적이며 일시 미봉적인 문제해결의 작태를 벗어나, 모든 문제 해결에 있어 원칙과 교육적 고려를 앞세우는 기풍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학교공납금은 정상적인 교육운영을 가능케 할 수 있을 한도 내에서 하나로 통합, 어떤 명목이든 이중·삼중으로 눈감고 아옹하는 식의 변태적 징수를 근절케 해야 할 것이다. 국·공립 학교와 사립학교를 가릴 것 없이, 학교공납금은 이를 수업료 하나로 통합케 하는 것만이 학교공납금, 또는 학교잡부금을 에워싼 온갖 잡음을 일소하고, 교사와 교육의 위신을 회복케 할 수 있는 근본대책이 될 것이다. 문제의 보충수업 문제도 오직 교육적인 견지에서 그 존폐와 대상 또는 시간문제 등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교사의 특별한 보충적인 지도가 따로 필요한 학생에게, 각기 필요한 시간만큼의 특별지도를 학교가 자율적으로 결정 시행케 하고, 이것과 공납금 문제를 절대로 결부시키지 않아도 좋도록 지도하는 것만이 올바른 교육행정의 방향이 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