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386)|<제46화>관세야사(33)엄승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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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라」호의 공과>
태풍「사라」호가 핥고간 세관피해만도 22억원에 이르러 세관측은 골치를 앓았다.
1959년9윌16일 추석날 저녁 한반도에 상륙한 「사라」호는 다음날 새벽부터 집중호우와 강풍을 몰고와 영·호남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부산항에 40년래의 참화를 남긴 태풍이었으나 마침 명절이었으므로 전국 부두노무자들은모두 놀고 부산세관직원들도 「사라」호 상륙당일 성묘간다고 출근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부산세관세무국장 김유하씨(서울·인천세관장역임)는 당일상로7시쯤 숙직직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긴급히 출근하기위해「택시」를 잡아탔으나 구부산역앞 광장을 지날 수가 없었다. 역광장은 벌써 물바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택시」에서 내려 하반신을 잠긴 채 건너 겨우 세관청사로 갔다.
새관꼴은 말이 아니었다. 청사아래 층과 창곤는 헤일로 물속에 잠겨 있었고 세관부두에 야적해 놓았던 면사·「펄프」등도 완전 침수되어 있었다.
세관계선장에 있던 인견사를 실은 부선과 세관감시선 몇척도 침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받은 이두희세관장(현투자공사사장) 은 숙직원과 청부를 시켜 세관전직원을 비상소집케 했다.
총동원된 직원들이 영도 적기지구 보세창고와 부두화물의 피해상황을 조사케 되었다.
태풍상륙 하룻만에 날이 개고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두·창고 노무자들 대부분이 추석으로 고향에 갔기 때문에 복구작업이 지지 부진할 수 밖에 없었다.
이틀쯤 지나자 대체로 세관수입화물의 피해조사가 끝이났다. 원목유실과 비료·인견사· 「펄프」·면사·잡화등 침수로인한 총피해액이 22억3천만원에 이르렀다.
피해상황은 태풍통과후 3일만(19일)에 송인상재무부장관에게 보고됐다. 당시는 서울∼부산간 철도·전화가 불통이었으므로 경남도경찰국의 무선전신으로 겨우 보고할 수 있었다.
뒤에 안일이지만 3일만의 보고였으나 신속한 보고라고 세관의 체면이 크게 섰다는 것이다.
다른 지방행정관청은 세관보고 보다 늦었기 때문에 국무회의에서 호통을 맞았다고 한다.
피해액이 엄청나고 보니 피해보상에 대한 보험료 지급이 큰 문제였다.
당시 보험은 영·미·불·기타 여러나라의 보험회사 대리점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급조건이 서로 달라서 입항까지, 입고까지, 또 입고후 1개월 까지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 보험회사들은 보상을 적게해 주려고 저마다 꾀를 부렸다. 그러면서도 당시 열강 여러나라는 한국에 대한 해상보험의 독점을 꾀하려고 했다.
부산세관은 보험회사들의 경쟁심리를 이용키로 했다.
김세무국장은 부산상공회의소 회두 박선기씨(작고)의 협조를 얻어 영국「로이드」보험회사대리점 협성해운의 왕상은사장을 만나 상의를 하게됐다.
왕사장이 서울에 있던 「로이드」보험회사 한국지점장(영국인)에게 여러차례 건의한 결과「로이드」사가 자기네 회사는 보험료는 전액 보장한다고 발표하고 이 사실이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다른 보험회사도 보험료지불을 늦추었다가는 오히려 나쁜 인상을 줄까봐 서로 앞을 다투어 지급케 되었다.
보험료가 지불된 손상화물은 각 보험회사에 넘어 갔는데 인견사·면사등은 말려서 가구부속품으로 팔려나갔다.
유실된 원목과 비료 같은 것은 회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보험회사가 큰 손해를 봤던 것은 물론이었다.
또 세관은 관세면세혜택등도 주었다.
「사라」호가 습격하기 전인 1959년7윌7일에는 부산평화보세창고에서 불이나 약3억원의 피해가 난일도 있고 해서 송재무장관은 태풍을 계기로 무역보험회사를 설립했다.
각 무역회사대표들에게 종용하여 대한무역보험회사를 창립, 전 초대세관국장 강성태씨가 사장에 않았다.
각 외국 보험회사들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했다. 보험료 지급조건을 완화하는등 한국의 수입화물에 대하여 유리한 조건을 경쟁적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결국 무역보험은 2중보험이 된다고 해서 인기가 떨어지게 됐고 무역보험회사는 창설3년만에 모국내 해상손해보험회사에 흡수 합병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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