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한-일 문화교류의 원류를 찾는다|조상의 뱃길 따라 만리 여정…삼한해로 답사선『한』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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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서해. 잔주름 같은 해류를 따라「한자」를 선명히, 십자형「마스트」에 단 목선이 남으로 남으로 미끄러져 나간다. 배에는 옛 우리 조상이 입은 그대로 흰 베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사공 10명이 두 줄로 타고 노를 저으며 힘겹게 물결을 가른다. 글자그대로 일엽편주.
인천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지난 20일 하오 2시 뱃길 1만리를 향해 떠난 삼한해로 답사선 한호(일본측은 야성호로 부름)는 항해 8일 들어 옛 마한·백제고장의 어귀인 금강입구에 들어섰다. 한-일 양국간 고대문화교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한 이번 삼한해로답사(한국 측 삼한해로 답사 회 회장 김원용, 일본측 왜인 전 연구회 회장 강기경 교수)는 중앙일보-동양방송, 일본 조일신문·NHK 등의 후원으로 실시된 장장 45일간의 여로.

<왜인 전 기록 따라 6월 출항>
기원전 3세기를 기준 하여 우리나라 삼국이전의 국가형태였던 삼한시대의 문물이 해로를 따라 일본에까지 전파된 경위를 그 당시와 같은 원시적인 형태의 배로 답사해 보자는 취지를 살려 답사선인 목선은 돛도 키도 달지 않았다.
답사 선에는 선원 10명 외에 양국 관계자·보도진 등 모두 21명이 타고 있다.
그 뒤를 쫓는 모선 송림호(1백9t)와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30배나 큰배가 가랑잎에 불과한 목선의 주위를 돌며 때로 선도하며 뱃길을 인도한다.
삼국지 왜인 전에 따르면 삼한을 거쳐 구주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 바 닷 속에 뛰어들어 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다는 기록에 따라 여름철이 아니었겠느냐는 뜻으로 6월에 출발한 것이라는 양국관계자들의 설명이나 이 시기에 가장 큰애를 먹이는 것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소위 계절풍. 항로를 가로막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당시에 돛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되 이를 고증할 길이 없고 6월 출항에는 돛의 사용이 키가 없이는 불가능한 점을 고려한다면 돛을 사용하고 싶어도 사용할 수가 없다. 키에 관한 기록은 고려조에야 나타난다는 것.
결국 노를 젓는 것은 선원(사공)의 힘과 조류만으로 1만여 리의 물길을 헤치겠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모선에 의한 예인은 당초부터 계획에 포함됐었으며 다만 이 같은 방법의 항로가 과연 이론대로 실천되었을 까 하는 문제를 재현해 보겠다는 일종의「실험적 답사」의 성격마저 지니고 있다.
인천∼영흥도∼풍도∼난지도∼만리포에 이르기까지 항해는 대체로 순풍에 돛단 격이었다.

<관장 목 파고에 한때 긴장>
한 답사반원은 예부 터 풍도가 해적 섬으로 알려져 왔을 뿐 또 동국여지승람 등 이조초기의 문헌에도 풍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데 비해 패총이나 지석묘가 발견됐고 게다가 4백년이 훨씬 넘었을 만한 은행나무가 2그루씩 있는 점으로 미루어『학술적으로 다시 답사,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는 섬』이라고 강조하기도.
대난지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당진군 석문면 난지도리.
그러나 이미 고종 때부터 보운선(일종의 수송선)이 드나드는 번창한 포구의 구실을 해 왔다.
이조 초 때는 군사적인 요지로 한때「진」(일종의 수군지역사령부)까지 설치했으며 그후에는「진」보다는 작은 규모의 해군기지인「첨」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손첨사의 후손들이 아직 살고 있으며 첨사가 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하마석」이 현재 난지도 국민학교 운동장 한 모퉁이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러던 중 지난 25일 아침 썰물 따라 만리포를 나간 한호는 처음으로 수난을 겪었다.
『배 띄워라 에 헤이」하며 흥겨워하던 선원들도 짙은 안개와 1·5m가량의 파도 때문에 노랫가락을 잊어버리고 약간 침울한 표정들. 동승한 양국관계자들도 처음으로「라이프·재킷」(구명대)을 착용했다.
l시간30분 가량 지난 후에 문제의 물 목인 관장 목 부근에 다다랐다.
모선 송림호의 선장 박태혁씨(47)는『위험하다』며 목선의 예인을 강요했다.
이곳과 안흥목에서는 예부 터 난파의 기록이 많다는 것.

<일본 선형연선 성공 확신>
이곳에서 예인하기 위해 모선과 목선은「워키토키」로 대화를 나눴다. 또 목선에 준비되어 있는 나침반에 방향각도를 수시로 지시한다. 고대에는 있을 수 없었던 현대화된 풍경.
『그 옛날 뱃길에 익숙한 인도자가 1만리의 해로를 이끌어 갔다고 가정한다면 그 경험이 과연 얼마나 정확했는가』하며 답사 반들은 새삼 놀라워했다.
안흥 포구는 원래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정자가 포구 앞섬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아 지어진 이름.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안흥정은 고려 문종 31년(1077년) 서산 해 미 11리밖에 설치한 것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설치된 고만도정이 육지와 떨어져 있어 심히 불편한 까닭에 이를 옮겨 놓은 것』으로 지금은 원래의 위치나 현재의 위치가 정확치 않다.
8일째 답사를 마친 일본측 등구건이씨(28·구주대 대학원생·고고학전공)는『항해가 일 정이 짧고 시험적인 점에서는 현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하고 또 목선「메이커」인 일본선형과학 연구소장 마힐경보씨(36)는『항해는 고대인들의 해로 1만리에 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인데 충분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받게 되어 선박문제만은 일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호는 28일에는 금강과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 유서 깊은 백제의 고도 부여의 낙화암에 이을 예정. 【글=이 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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