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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 악보에 충실한 연주, 건조함 속 묘한 매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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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27면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의 첼리스트 엔리코 마이나르디. ‘첼로의 귀족’이라 불렸으며, 특히 바흐 연주에서 정평이 있다. 작곡·지휘에서도 알려졌다.

한낮에 집에서 오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고 있는데 손님이 왔다. 꽤 시간이 지난 이야기인데 그때는 아파트 1층이 음악 듣기에 좋을 것 같아 일부러 1층에 살던 때다. 손님은 처가 쪽 젊은 여성인데 그녀는 시장에서 조그만 편물가게를 운영하며 고객에게 뜨개질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현관에 들어서던 그녀가 난데없이 손뼉을 딱 치며 크게 소리쳤다. “어머나! 이 음악이야. 바로 이거라고.” 나는 그때 바흐의 ‘무반주첼로모음곡’을 듣고 있었다.

엔리코 마이나르디의 ‘바흐’

일본 교토에는 ‘철학의 길’이라는 거리가 있다. 관광코스로도 이용되는데 나도 오래전 교토에 잠시 들렀던 적은 있으나 그곳은 구경하지 못했다. 편물점 주인은 오래 벼르던 일본 패키지 여행에 나섰다가 이 철학의 길에서 뜻밖에 바흐 음악 세례를 받았다. 일행과 함께 그 길을 걷고 있는데 어느 목조 이층집에서 음악이 흘러나와 그녀 혼자 걸음을 멈추고 그 음악을 끝까지 들었다. 그 바람에 일행과 헤어지게 돼 뒤에 합류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평소 음악, 특히 서양 고전음악을 자주 듣지 않던 그녀는 그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 알지 못했다. 귀국하자마자 그녀는 그 음악을 찾아나섰지만 찾지 못했다. 음반가게에서 곡명도, 선율의 특징도 설명하지 못한 탓이다. “기억에 남을 만한 선율도 없고, 너무 건조하고 싱거운데 그래도 울림이 컸어요.” 그녀 말을 듣고 나는 그녀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은 그 연주가 엔리코 마이나르디(Enrico Mainardi, 1897~1976)의 연주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봤다. 너무 건조하고 싱겁다는 말 때문이다.

여행기간에는 감각이 예민해진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위해 감각이 미리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 그녀는 평소라면 그냥 흘려 넘겼을 음악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날 이후 그녀는 오디오 매니어가 되고 음악도 열심히 듣게 됐다. 나는 바흐 음악의 새 신도가 된 그녀를 위해 안내자 역할을 자청하고 세운상가로 가서 오디오 구입도 주선해주고 음반 구입에도 조언을 해주었다.

엔리코 마이나르디는 그 많은 첼로 연주자들 가운데 자기만의 독특한 연주 기풍으로 기억되는 아주 특이한 이름이다. 그의 기풍은 오직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에서만 유독 완벽하게 작동하고 발휘된다. 그가 슈만의 첼로 협주곡이나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연주할 때는 다른 연주자와 크게 차별화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바흐 곡의 경우에 그는 루바토나 비브라토가 완전히 제거된, 어찌 보면 노래 없고 윤기 없는 무미건조한 연주로 일관한다.

이 연주를 처음 듣고 나는 좀 심한 비유일지 모르나 “독일병정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오직 한 걸음 한 걸음 절도 있게 앞으로 행군하는 것 같다”고 표현한 바도 있다. 음반도 그가 녹음을 자주 하지 않은 탓으로 가짓수가 많지 않으며 LP는 말할 것도 없고 CD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다. 특이한 연주 기법에 희귀성까지 곁들여 그의 음반은 성가를 높였고 이 곡은 음반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갖춰야 할 필수 목록이 되어 있다.

엔리코 마이나르디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에 관해서는 이 곡 연주의 발원지이고 큰 흐름의 시조라 할 카잘스에 반기를 든, 최초의 본격적 이단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특징은 그렇지 않아도 변변한 선율미가 부족한 이 곡에서 노래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기 연주에 관해 여러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보잉과 핑거링에서 감정을 개입시키는 것보다 4현의 각기 다른 음색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자주 빠른 연속음이-조곡 3번의 경우-제대로 살지 않고 모호하게 슬쩍 넘어가는 때가 있는데 이것 역시 연주자가 흥에 겨워 악보의 지시를 무시하는 오류라고 그는 보고 있다. 이 3번이 사실은 전체 조곡 가운데 가장 분위기가 밝고 흥겨운 곡이기도 하다. 각 현의 음색을 살리고 빠르게 스치는 짧은 음을 제대로 표현하자면 아무래도 느리고 정확하게, 병정의 걸음처럼 진전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 곡에서 노래- 소울(soul)-보다 음색과 형태를 더욱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연주자의 주관에 의한 루바토와 비브라토의 범람에 대해 그는 ‘인간의 노래를 어설프게 흉내내려는 것’이란 표현까지 쓰고 있다. 그런 경향을 대표하는 연주가 지금도 여전히 카잘스의 낭만과 열정의 연주다. 그런데 엔리코 마이나르디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는 자신이 작곡자가 처방한 기록에 가장 충실한 연주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작곡자는 어느 편에 설까? 그 해답을 얻는 길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비평이나 논리보다 청중의 선택과 반응이다. 현재 대다수 연주자의 경향으로 볼 때 그 해답은 나와 있으나 엔리코 마이나르디 역시 고독하지는 않다. 적지 않은 감상자들로부터 그의 색다른 연주가 차분하고 정화된 감정을 준다는 호평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연주가 음악의 순수성을 살려내는 청량음료 같다고 격찬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미래를 예견한 듯 이색적 연주로 명성을 얻을 생각이 없다고 미리 단언했으나 결과는 그대로 되었다.

노래인가? 형태와 색채인가? 이런 논란이 있는 것도 오직 이 곡만이 갖는 특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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