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가 부른 총성, 외교 실패 탓 인류 위협 포성으로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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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았다. 국제사회가 대화를 통한 전쟁 방지에 실패하고, 미증유의 참극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그 원인을 둘러싸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논쟁이 벌어진다. 1차 대전은 한 세기를 넘어 오늘날의 국제사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1 세르비아 민족의 분노가 도화선
국제사회는 자칫하면 무력을 사용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지루하고 힘든 외교적 대화와 설득, 타협과 양보의 과정을 거치는 대신 우세한 무력을 사용해 상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싶은 유혹이다. 전쟁 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이 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대전의 도화선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오스만튀르크 땅이던 보스니아를 1908년 오스트리아가 자국영토로 합병하자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 인구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던 세르비아계 주민은 이를 세르비아에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을 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불렀다. 암살범인 19세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도 그런 생각을 했기에 거사에 나섰다.

하지만 이 암살 사건 자체보다는 사후 해결을 둘러싼 외교의 실패가 대전의 더욱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만만치 않다. 전쟁은 암살 사건 직후 펑 터진 게 아니다. 한달의 시간이 있었다. 그 과정은 이렇다.

암살 일주일 뒤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독일에 “세르비아를 공격할 경우 그들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나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지원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동맹인 독일은 지원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힘든 외교보다 손쉽게 보인 무력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국가의 ‘능지처참’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현재 11개국에 걸쳐 쪼개져 있다.

2 동맹이 초래한 연쇄 선전포고
그 뒤 한 달 가까이 유럽 각국은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 노력을 벌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심지어 영국과 독일, 러시아 왕실은 혈연관계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를 믿은 세르비아는 자존심을 앞세웠다. 독일을 믿었던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슬라브 종주국을 자처하던 러시아는 남슬라브족인 세르비아를 돕겠다며 즉시 병력 동원령을 내렸다.

사흘 뒤 독일은 러시아에 동원 중지를 요청했으나 “동원은 오로지 오스트리아가 대상”이라는 답을 받았다. 다음 날인 8월 1일 독일은 동맹을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틀 뒤인 독일은 3일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그 중간에 있는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훼손했다며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틀 뒤 고민하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때부터 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무력 사용의 유혹에 빠져 외교보다 힘에 의존한 것은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동맹의 한계다. 군사공동체인 동맹만으론 결코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외교 노력을 수반하지 못한 동맹은 더더욱 효용이 떨어진다는 교훈을 주는 게 아닐까.

3 전쟁 이면엔 헤게모니 경쟁
당시 영국의 개입에는 또 다른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영국 외교관 아이어 크로(1864~1925)가 1907년 외교부에 자청해 제출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과의 현재 관계에 대한 비망록’에서 지적한 내용이다. 크로는 여기에서 “독일이 우선 유럽 패권(hegemony)을 추구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세계 패권을 노릴 것”이라며 “독일은 과거 스페인의 펠리페 2세, 부르봉 왕가, 나폴레옹처럼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독일에 대해선 양보를 통한 유화정책보다 가진 힘을 활용한 단호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독일·영국 혼혈로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크로는 당시 최고의 독일 전문가로 간주됐다. 그의 제안은 영국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871년 통일을 이룬 독일은 당시 철강 생산능력이 세계 수준에 이르는 등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영국 시장을 위협하고 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중국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협하는 현재의 상황과 겹치는 대목이다.

4 미숙한 전후 처리, 2차 대전 불씨
강대국 간 갈등의 미봉과 미숙한 처리는 국제사회에 심각한 갈등의 씨앗을 뿌리곤 한다. 1차 대전 승전국의 전후처리 미숙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불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1차 대전 당시엔 그뿐 아니라 민족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미숙함을 보였다. 승전국들은 대전 이후 “언어가 같다”는 이유로 역사와 전통이 다른 체코(보헤미아+모라비아)를 슬로바키아와 합쳐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나라는 결국 1993년 1월 합의에 의해 분리됐다.

같은 이유로 만든 유고슬라비아는 91년 민족별로 조각조각 해체된 것은 물론 92~95년의 보스니아 내전까지 치렀다. 최근의 우크라이나 사태도 이러한 민족 문제가 한 원인이 됐다는 지적을 받는다. 민족문제를 당사자가 아닌 강대국의 시각에 의해 강요할 경우 어떤 사태가 생길지 모르는 것이다.

5 한국 3·1운동의 기폭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인 오스트리아를 조각 내면서 거기에 살던 민족에 한정해 적용한 것이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식민지를 포기하게 만드는 동시에 영국·프랑스 등이 그를 대신 차지하는 것을 견제하려는 게 원래 취지였다. 기존에 전승국이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식민지의 피압박 민족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론 이게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민족의 자각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국에선 1차 대전 직후인 1919년 3·1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는 중국의 항일운동과 민족주의의 탄생에도 한몫했다. 1차 대전 참전국 중 가장 적은 인명피해를 낸 일본은 종전 뒤 산둥반도의 옛 독일 식민지를 같은 승전국인 중국에 돌려주지 않고 점령하려고 획책했다. 이에 분노한 중국인들은 3·1운동 직후 5·4운동을 벌여 일제의 야욕에 항거했다. 한때 쑨원(孫文)을 비롯한 중국 선각자들의 요람이던 일본은 1차 대전에서 파생된 이 사건으로 중국 민족주의의 최대의 적이 됐다. 원칙 없는 강대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이 부른 당연한 결과다.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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