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정착위한 한국의 노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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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괴 김일성은 지난 5월22일부터 동구공산권과 북아비동맹중립국을 순방하면서 그의 이른바『자주적평화통일』을 선전하고 있다.
불과 한달 전 중공 방문길에 『남조선혁명지원』을 방언하던 것과는 상이한 태도다. 이야말로 북괴가 또다시 위장평화공세를 재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도차이나」의 공산화에 힘입어 그들이 고조시킨 한반도의 긴장이 득보다 실을 가져왔다는 판단이 그 급전의 원인일 것이다. 중공에서의 김의 호전적 발언은 미국 및 일본조야의 여론을 대한지원 쪽으로 기울게 하고 우리국민의 경각심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김의 새로운 평화공세는 전술상의 변화일 뿐 그것을 무력적화통일이란 기본전략의 변화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북괴는 지난 30년간 무력적화통일목표를 견지하면서 가끔 이를 위장, 평화공세로 분석해왔다. 아니, 사실은 오히려 평화공세를 필 때가 더 위험했던 게 역사의 교훈이다.
6·25남침직전 북괴가 대대적 평화공세를 폈던 사설과 아울러 7.4남북성명 체결을 전후해 휴전선 땅굴을 착공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6·25직전 그들은 6월7일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단일국회구성, 10일엔 조만식선생과 이주하·김삼룡의 교환, 19일엔 남북단일국회 구성을 위장 제의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여망을 걸었던 7·4남북성명과 그 이후의 남북대화마저를 적화통일 목표에 이용하려했다.
이 점이 바로 김일성의 급전된『자주평화통일』선전의 기만성을 경계해야할 이유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북괴의 평화공세는 김의 동방국의 일반적 경향을 의식한다음의 다분히「제스처」적인 면도 있다.
같은 공산주의자라도 비교적 현실적인 동구국가와 비동맹중립국에는 호전자세보다 평화적「제스처」가 더욱 호응을 받을 여지가 크다.
특히 올 가을「유엔」이 총회를 앞두고 제3세계에 평화애호집단이란 인상을 심어놓을 현실적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역사와 실정에 어두운 국외자중에는 북괴의 이 같은 위장자세를 사실로 착각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북괴의 위장평화공세의 진상을 철저히 인식할 뿐 아니라 일부 외국의 잘못된 인식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 대책을 마련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진정한 긴장완화를 위해 일관된 노력을 기울인 것은 다름아닌 우리정부와 미국·일본 등 자유우방측이었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지난70년 박대통령의 8·15선언을 선두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해 남북대화·상호불가침·평화공존·「유엔」동시가입 등 여러 방안이 우리측에 의해 제시됐다. 미·일·중·소 4대국의 남북한교우승인 4강보장론 등도 제기됐었다.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한 이 모든 방안이 남김없이 북괴에 의해 거부됐던 것이다. 필경 이 모든 제안이 폭력과 혁명에 의한 적화통일이란 그들의 목표와 상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추구의 요체는 이제 「방안」의 문제는 아님은 거의 분명하다할 것이다. 절묘한 방안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우리의 성의있고 일관성 있는 통일방안을 어떻게 하면 전세계에 이해시키고 모 어떻게 하면 북괴로 하여금 그들의 광신적인 혁명노선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느냐가 문제다.
북괴의 혁명노선 포기는 내외적 힘의 여건이 이를 강요할 때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우리 국력의 북괴압도와 미·일의 억지력, 중·소의 자제력의 조화가 이러한 여건의 기본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떤 기발한 방안의 제시보다는 우리의 국가적 역운을 모아 북괴가 혁명노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한반도와 그 주변에 안정된 힘의 배치를 위해 내정과 외교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대학의 질적 개혁>
외형적인 팽창에 반비례하고 있는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문제는 오늘날 어느 나라에서나 고등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이룬다.
이른바 고등교육의 「보편화」,또는「대중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왕성한 논의도 그 중대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 본지 문화면에 연재된 『서구의 대학제도』에 관한 특파부보도가 시사하는 것도 바로 그 것이다.
이에 의하면 서구문명의 중핵을 이루는 나라들도 각기 자기나라의 대학으로 하여금 오늘의 세계에서 어떻게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에 부심하고 있다.
이들 나라들은 대학의 오랜 전통적 기능이었다 할 문화의 계승 및 창조, 지도자의 양성, 그리고 사회봉사 등의 역할을 견지하면서 현대의 산업기술사회에 가장 훌륭하게 대처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자기 나름대로 사삭하고 각기 그 개혁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대학교육은 전통적으로 소수「엘리트」양성을 목표로 했으며, 한마디로 영국신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엘리트」교육도 일반교양교육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전문적·기술적·직업적 다수교육을 추구하게됐다.
그것은『1944년 교육법』의 결과이며, 1963년의 「로빈스」보고의 목차다.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우수한 인재를 많이 고등교육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대학은 50년 당시·24개 대학, 8만5천명에서 급격한 팽창을 거쳐 오늘날 44개 대학에 24만명의 학생을 갖게 되었다.
한편「프랑스」의 경우는 이와 대조적이다. 68년 학생 「데모」이후 대학교육이 대중화의 추세로 개혁되었다고 하지만, 소수지적 「엘리트」만의 엄선원칙이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입학 자격취득을 위해서는 어려운 국가예비고시인「바칼로레아」를 거쳐야하며,
또 입학하더라도 대학과정의 중간시행을 통해 졸업은 대학입학자의 35%정도만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입학은 비교적 쉽고 졸업은 극히 어려운 대학제도로, 자질이 우수하고 학업에 충실한 정선된 인재만이 사회에 배출되기 마련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대학의 질적 저하문제로 고민하는 우리는 양자택일 또는 절충의 대학개혁을 추구할 수 있겠다.
6·25동란과 더불어 난립한 우리의 대학들이 고등유민을 분산하여 갖가지 부작용을 파생시키며 서민가계를 마비시킨다는「대학망국론」을 낳게 했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물론, 이 같은 교육열이 오히려 사회발전에 적잖게 공헌한 면도 없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개발도상의 이 나라가 괄목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고등교육 인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라고 지적되기도 한다.
실상 우리의 대학생수는 인구비로 볼 때에는 반드시 많다고만 볼 수도 없다. 입학적령층에 대한 입학자비로 볼 때 미국이 43%,「캐나다」26%,일본 21%,영국 13%에 비해 우리는 8%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의 대학교육은 급격히 팽창하고 있는 학비부담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실현하기 위한 1대 개혁의 과제를 안고있다.
그 점에서 우리는 영국처럼 대학생의 수적 증가를 촉구하면서 경제적으로 돈이 많이 드는 이른바 「튜토리얼」(개인지도교수)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질적수준을 높이든가, 아니면「프랑스」처럼 주로 지적인 소질면에서의「엘리트」교육을 위해 엄격한 육성제도를 택하든가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두 나라 중 어느 경우이건 대학의 재정은 거의 90%가 국가보조이며, 소질이 있는 자에 대한 교육의 기회는 거의 전적으로 개방돼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고등교육에 대한 재정보조는 사립대는 고사하고 국립대에서조차 영세하기 이를 데 없다. 또 취직조건 등 고등교육 인력요구는 그 질은 여하간에 증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만큼 오늘의 여건으로 급격한 개혁은 어렵다. 단지 교육의 질을 높이고 학생의 자질을 높이는 방안으로 「프랑스」식의『입학은 쉽고 졸업은 어려운 제도』가 원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교부가 교육정번의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할 것으로 보이는 「대학졸업제도개선방안」은 이런 시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를 지녔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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