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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암흑 속의 23년」 참회의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69년 초여름부터 나는 첩보원으로서의 본격적인 공작훈련에 들어갔다.
첫 교육도 공작용무전기 사용법이었다. 무전기는 담배 갑 2개만한 크기였으며 구조와 조작을 익힌 다음 평양의 무선국과 미리 시간을 정해놓고 송·수신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방안에 들어앉아 했으나 숙달된 뒤로는 야외에 나가 「안테나」설치법·지형선택 요령 등을 배우면서 교신훈련을 계속했다.
고속도「키」조작 훈련도 곁들여 보통「키」는 시간이 많이 걸려 송신 중 탐지될 우려가 크기 때문에 부호를 미리 조작, 말을 만들어 놓고 「키」로 더러럭 긁기만 하면 되는 이 고속도「키」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 같은 훈련이 거의 끝난 8월말에 가선 총화훈련이라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체력을 단련하고 정신무장을 다진다는 명목아래 소위 말하는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전적지를 답사하는 과정이었다 양강도(함북) 보천보를 비롯, 갑산, 무산을 거쳐 백두산 천지연까지 올라갔으며 거기서 무선국과 교신도 해보았다. 이어 수영 암서법·난수표 사용법·「마이크로 필림」제작법 등의 마지막 과정을 밟았다. 수영은 대동강상류 양각도에 가서 천막을 치고 1주일동안 배웠다. 해안 침투·탈출 등 비상시 써먹기 위해 배우는 것으로 20m밖에 못나가던 내 실력이 강훈 덕으로 5백m는 너끈히 나가게 됐다 나는 이때 5백m 하류에서 나처럼 지도원의 지시를 받으며 수영훈련을 하는 또 한 명의 공작원 피교육자를 목격하기도 했다.
내가 남한이 아닌 일본에 밀파된다는 사실도 이 수영훈련을 받던 9월초에 비로소 알았다.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일본에서의 생활 및 일어실력 등을 묻기는 했으나 단순한 경력조사려니 했었는데 알고 보니 처음부터 나를 일본에 밀파키로 점을 찍어놓고 물은 것이었다.
정말 의외의 임무였다. 나는 일본서적·신문·잡지 등을 펴놓고 새삼 대판을 비롯한 일본시가 지리·풍속을 익히고 「테이프·레코더」를 이용, 일본말 연습도 다시금 했다.
이렇게 해서 교육이 모두 끝난 것은 10월 하순-. 나는 마침내 간첩번호 l336호 대일 공작원으로 만들어지고 첩보 임무를 받았다.
나에게 떨어진 임무는 북송된 재일동포 장경자(제주도출신·그 때 결혼해 있었음)의 일본에 있는 아버지 장년종씨(47·철강재「브로커」·대판부 팔미시)등 5명의 북송가족들을 포섭, 남한공작원과 당연락부와의 중계거점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이어 포섭 대상자들에게 갖고 갈 재북 가족들의 편지·사진 등을 챙기고 소지품 준비도 하는 등 바쁜 며칠을 보내고 1969년11월5일 하오 3시 일본어선으로 위장한 쾌속정을 타고 일본 「아오모리」현 앞 바다를 향해 청진항을 출발했다. 아내 김재실과 네 꼬마에게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떠나는 비정의 잠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붉은 생활 23년은 순간의 실수가 빚은 악몽이었다. 비록 속아서 넘어가긴 했지만 자유대한을 등진 입북과 그로 인한 재북 생활·대남 공작행위 등 모든 과오가 이념상의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부끄러움을 깊이깊이 느낀다. 역설적이긴 하나 내가 공작원으로서 자유 세계에 밀파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북괴의 일원으로 하루하루를 암흑 속에서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각하면 새삼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지금 나는 아내와 초등교 교사인 아들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되찾아 있다. 나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다. 동생과 친척 등 모두가 무슨 일이 있으면 나와 상의를 하고 내 말을 잘 따라 주는 것이 꼭 딴 세상에 온 것처럼 신기하고 기분이 좋다. 당국의 배려로 제2의 삶을 되찾은 나는 앞으로 몸과 마음을 반공 전선에 바쳐 속죄에 대할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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