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유엔」 구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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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의「유엔」주재대사로 내정된 「모이니한」교수는 장차 「유엔」에서의 미국의 위치를 『야당』으로 자임한 일이 있다.
『그 동안 미국은 「유엔」에서 무리하게 여당 역할을 하느라 사방에서 두들겨 맞았다. 이제는 야당노릇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미국의 쓰라린 자각의 표현이다.
아·아와 남미의 이른바 제3세계에 속하는 나라가 「유엔」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면서부터 미국뿐 아니라 소련을 포함한 강대국의 「유엔」지배질서는 변모했다. 이러한 「유엔」의 세력재편은 이 기구의 제1의적 임무인 세계평화유지 기능의 무력과 겹쳐 「유엔」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집단안전보장을 통한 세계평화의 유지와 분쟁의 평화적 해결기능은 이미 「유엔」의 손을 떠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쟁의 해결이 관계강대국과 분쟁당사국의 막후협상에 전적으로 의존하게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비근한 실례로 최근까지 20년이나 끌어온 「인도차이나」에서의 전란 중 「유엔」은 거의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뿐 아니라 피난민 구휼이란 인도적 사업마저 외면했다. 따라서 인지사태가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한 이제 이 무력한 「유엔」에 우리의 안보문제를 연계시켜온 우리의 전통적「유엔」외교는 일종의 허망감마저 느끼게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우리는 「유엔」이 대한민국수립의 산파역을 맡았고 북괴남침시 「유엔」군의 깃발을 제공했다는 역사 때문에 이 기구를 항상 과대 평가해 온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유엔」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보다는 현재적인 외교를 펴야할 시기가 된 것이다. 우리가 싫건 좋건 정부나 국민 모두가 탈「유엔」의 시대감각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특히 작년 29차 「유엔」총회가 서방측 결의안을 19표 차로 가결하고 공산 측 결의안을 가 부동수로 부결한 상황하에서는 「유엔」에서의 우리의 지위가 얼마나 지속될지 부터가 의문시되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아프리카」 몇 나라의 서방접근경향, 인지 이후의 미국의 새로운 외교방향정립 움직임 등 우리에게 긍정적인 요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지공산화 이후 동남아의 중립화 경향, 「크메르」의 붕괴, 「포르투갈」·「차드」의 좌경 등 불안요소가 더 뚜렷하다.
우리는 지난 68년부터 한국문제를 점진적으로 「유엔」의 테두리 밖으로 가져가려는 탈「유엔」정책을 추구해왔다. 그것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유지에 대한 「유엔」의 무력에 대한 실망과 변모한 「유엔」의 판도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정책방향은 북괴의 공세로 뜻대로 수행되지 못했다. 북괴는 금년에도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 「유엔」군사 해체와 미군철수를 관철하려 획책할 것이 틀림없다.
물론 「유엔」총회에서 어떠한 결정이 내린다해서 안보리 소관인 「유엔」군사나 한·미 양국간 문제인 주한미군의 지위에 변동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더욱 한·미 방위조약에 의한 주한미군의 존속여부에 대해 「유엔」이 어떠한 용훼도 할 성질이 아닌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러므로 탈「유엔」의 문제는 현실적으로는 「유엔」군사해체문제로 귀착된다.
「유엔」군을 일방당사자로 하고있는 휴전협정의 효력을 유지할 대안만 마련되면 「유엔」군사해체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게 정부방침인 만큼 대안의 발견이 탈「유엔」의 전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휴전협정체제를 유지시킬 대안의 마련 없는 탈「유엔」은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분명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국방력과 한·미 상호방위체제가 한국안보의 양대 지주란 사실이다.
이미 세계평화유지기능을 상실한 「유엔」대책을 위해 우리의 외교력을 소진하기보다는 우리의 국력을 직접 신장하는데 기여할 안보·경제외교의 전개가 너무도 절박한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탈「유엔」은 지금 우리가 어차피 극복해야할 진통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유엔」의 평화유지 기능의 무력을 국제여론 환기기능의 무력으로까지 오해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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