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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의지의 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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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세기 이후의 전쟁은 대개 선전포고와 함께 일어났다. 가장 고전적인 예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이때 「오스트리아」는 시한부 최후 통첩을 먼저 보내고 그 다음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야 한다. 그래서 선전포고에도 여러 가지 법칙이 있다.
제2차 대전 때 독일은 진격과 선전포고를 동시에 했다. 상대국에 방어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사후 포고하는 경우도 많다.
『…8일 미명을 기해 전면적 교전상태에 돌입했음…』-. 이것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다음에 일본이 발표한 포고문이었다.
물론 아무런 포고도 없는 경우도 있다. 6·25때 남침한 북괴가 그랬다.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선전포고가 통고되면, 상대방에 전쟁준비가 없어도, 또는 전의가 전혀 없어도 어쩔 수 없이 전쟁 속에 휘말리게 된다.
이래서 전쟁은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손쉬운 예가 중·일전쟁의 시발이 된 소위 노구교사건이었다. 1898년에 미국과 「스페인」사이에서 일어난 전쟁도 비슷한 예였다 할 수 있다.
전쟁은 양쪽에 모두 전의가 없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곧잘 서로가 도발하고 도전하곤 한다. 외교가 무력을 동반한 고도의 신경전으로 바뀌어 졌다고 할까.
지난 12일 「캄보디아」는 공해 상에 있던 미 상선과 그 탑승원 36명을 나포했다.
「캄보디아」가 왜 이러한 도발을 했는지 이유는 분명치가 않다. 최근의 전승에 도취된「캄보디아」 공산정권의 우쭐한 시위 행동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미국에는 「푸에블로」호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지난 68년 북괴가 「푸에블로」호를 불법 나포했을 때에 미국은 마냥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결국 미국은 북괴측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 다음에야 해결을 보았다. 이번에 「캄보디아」도 이런 전례를 생각했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제7함대 항공모함이 나포 수역에 급파되고 공군기는 「캄보디아」 포함 7척을 격침 또는 격파시켰다. 「캄보디아」의 도발에 미국은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무력 시위로 맞선 것이다. 「캄보디아」쪽의 오산이었다고 만 볼 수는 없다.「푸에블로」호 때의 교훈을 미국이 살린 것이다. 더욱이 「크메르」·월남전 때 이후 몰리기만 하던 미국의 위신 때문에 방위 의지가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캄보디아」는 나포한 상선을 석방하기로 했다는 외신이 들어왔다. 근래에 없던 통쾌한 「뉴스」다. 이번 일로 공산 측이 많은 것을 배웠다면 다행이다.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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