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 어리다고? 우리는 당당한 리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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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 30대 임원. 연공서열이란 장벽이 여전한 한국에서 이들의 성공담은 부러움을 살만하다. 자연히 이들이 임원의 반열에 오르기까지의 역정이 궁금해진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의 권순영(37) 부사장.다국적 제약회사인 한국MSD의 최연소 여성임원인 김보경(33.영업 담당)이사, 스위스에 본사를 둔 식품메이커인 네슬레의 데이비드 맥다니엘 (35.재무.회계 담당)이사 등 세 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들이 '나의 임원생활'을 털어놓았다.

◆30대 임원이 돼보니

▶권순영=1994년 컨설턴트로 입사해서 6년만에 부사장이 됐으니 우리나라 회사로 치면 초고속 승진이죠.그러나 매일 12시간이상 일에 매달리기 때문에 10년 정도의 직장 생활을 압축해 한 셈이죠.나이가 젊으니 직원들과 벽을 허물고 대화할 수 있어요.

▶김보경=회사 전체를 보는 눈이 생겼지요.하지만 서열과 나이가 중시되는 영업 조직을 맡았기 때문에 직원들을 이끄는 데 애를 먹기도 하지요.'어린 사람이…'라는 비아냥 소리를 안 들으려고 남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감도 적지 않죠.미혼이다 보니 일에 파묻혀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으로 여길 때 부담도 되고요.

▶맥다니엘=영국에서 스물일곱살의 나이로 임원이 되었을 때 동료 임원들이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죠.저는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며 많이 배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승진 이면의 숨은 노력

▶權=굳이 꼽으라면 일에 대한 열정이지요. 일에 집중하면 더 이상 일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거죠. 기업을 자문하게 되면 온종일 그 기업 생각만 합니다. 길을 가다가 그 회사의 영업점이 나오면 들어가 보고,TV를 보다 그 회사 광고가 나오면 광고 카피, 배경 화면까지도 눈여겨 봅니다.

▶金=성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도전의 기회를 주는 다국적기업에 들어온 것이 제겐 행운인 것 같아요. 회사 설립 초기에 평사원으로 입사했고 회사가 커지면서 다양한 업무를 해본 것이 큰 힘이 됐어요. 솔직히 임원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일하지는 않았거든요.

▶맥다니엘=세계 곳곳에 있는 지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이 무기가 되더라고요. 여러 사업분야에서 일하며 생산.재무.총무등 지원부서와 긴밀하게 협력한 경험이야말로 제겐 큰 자산이지요.

◆선입견과 관습의 벽은 높았다

▶金=제 고객은 의사예요. 보수적이고 나이 지긋한 대학병원 교수님들을 만나 이사 명함을 내밀면 매우 당황 하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같이간 남자 부하 직원하고만 이야기를 했지요. 나이와 경륜을 내세워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방식이 먹힐 땐 난감해요. 나는 부하직원들에게 권한을 많이 주고 책임을 따집니다.

▶權=한번은 모 은행의 전국 지점장들을 대상으로 새 영업점 전략과 구조에 대한 주제발표를 하는 자리가 있었어요. 현장에 이르게 도착해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가 발표자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죠. 지점장들은 저에게 "커피는 어디 있느냐, 점심은 뭘 주느냐"며 이것 저것 물어 보더라고요. 그러고는 곧바로 그 회사의 최고경영진을 놓고 낯뜨거운 잡담을 나누더군요.

▶맥다니엘=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서 몇년간 일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한국 조직 문화에 어렵지 않게 적응한 편입니다. 물론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나이나 입사연도가 중시되는 연공서열 문화가 철저하더군요.

업무 성과와 능력으로만 승진 인사를 하는 곳에서만 일해온 나로선 충격이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추천한 직원이 승진인사에서 누락됐지요. 나이와 근무연수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직장문화는 어떻게 다른가

▶權=외국기업들은 한두 명의 '간판 스타'에 의존하는 것 같아요. 그 만큼 단기 성과에 급급한 편입니다. 한국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먼 미래를 내다보며 투자하고 애사심을 가진 임직원들을 중용합니다. 개인보다는 기업을 중시하는 자세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향 평준화▶집단 이기주의▶조직의 경직성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지요.

▶맥다니엘=한국 기업의 조직 장점 가운데 하나는 직원들에 안정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안정감은 직원들에게 강한 소속감을 갖게 하고 회사에 헌신하게 만들지요.

반대로 업무 성과를 기준으로 한 보상이나 승진제도는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회와 기업 내의 전통적인 조직 구조나 노조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이 같은 문화가 정착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金=1년간 미국 본사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요. 미국기업과 한국기업을 비교할 처지는 안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 기업은 가족적인 분위기란 것이에요. 사생활에 속하는 이야기도 서슴없이 나누기도 하지요. 하지만 미국은 일과 개인생활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 임원이 되는 길

▶맥다니엘=늘 자신의 신념에 따르고, 하는 일에 자신이 있다면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특히 전세계 어떤 나라든 임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서는 인내심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金=가장 중요한 것은 일에 재미를 붙여야 해요. 임원 승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일에 매달린다면 쉬 지쳐버리는 경우가 있지요.또 리더십을 개발할 기회를 많이 만들 필요가 있어요.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요에 따라선 부하 직원에게 힘을 주위 동료와 함께 최선의 성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權=틈 날 때마다 전 후배 컨설턴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회의 전에 최소한 20분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회의나 보고는 본인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많은 경우 보고서 자체 보다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논리적 사고에 높은 점수를 주거든요.

글=표재용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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