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나는 간첩 번호 제1336호|「암흑 속의 23년」 참회의 수기 김일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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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내가 「바라크」 신세를 면한 것은 결혼 3년 만인 61년께였다. 새집은 외성 구역 오탄동의 2층짜리 「아파트」로 방 1개에 부엌 1개. 말이 「아파트」지 한간에 한집씩 들어가도록 돼 있는 구조로 창문이 나 있는 뒤편에서 보면 흡사 「하모니카」 구멍 같다고 해서 「하모니카·아파트」란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당시 나는 내각 직속 「자동차 및 도로국」이 철도성과 병합, 교통성으로 개편됨(60년 봄)에 따라 성자동차공장 관리국 노임부장을 거쳐 자동차 국장급 지도원으로 있을 때였다. 장급지도원은 자동차 수송을 조직하는 부장급. 중앙부처의 부장급(남한으로 치면 과장급)에 배당되는 집이 겨우 이거였다.
그러나 이 벌통 같은 「아파트」를 차지한 것만도 당시로는 큰 대우를 받은 것. 뒷골목에는 깨진 벽돌을 쌓은 이른바 전후 복구 주택이 그대로 도사리고 있었으며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생각하면 이런 집이라도 얻어걸리기까지 우리의 노력 동원은 피나는 것이었다.
전후 평양 시가는 휘어진 전차선로, 넘어진 건물과 전봇대, 움푹 팬 폭탄 자국 등이 잡초 속에 뒤 엉긴 폐허나 마찬가지였으며 사람들은 이 폐허에 무 구덩이처럼 땅을 파고 흙을 덮은 토골집에서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폐허의 복구 기간은 휴전 협정 직후의 준비 기간 6개월을 거쳐 54년부터 56년까지의 피해 복구 3개년 계획과 57년부터 61년까지의 1차 5개년 계획 등 무려 8년여.
이 8년여 동안 『전 인민은 전후 인민 경제 복구 발전에로』라는 「슬로건」 아래 노력 동원에 내몰아졌다.
기관도 예외일 수 없어 나의 경우 출판사 및 도로국 재직 동안 거의 거리에 나가 살다시피 했다.
넘어진 건물을 깨는 일, 깨진 벽돌을 고르는 일, 「아스팔트」를 배합하는 일 등등 안해 본 작업이 없다.
작업은 부서별로 조를 짜 절반이 사무를 보면 반은 일을 나가는 등 교대로 했다.
처음엔 사무가 대충 끝나는 하오 6시쯤 배당된 작업장에 나가 철야 일을 하고 상오 6시쯤 교대, 집에 가 눈을 붙인 다음 하오 3시쯤 출근, 그때부터 3시간쯤 사무를 보고 또 작업장에 나가는 식.
사무는 밀릴 대로 밀리고, 몸은 시달리고, 잠은 모자라고 어느 하루 머리가 멍하지 않은 날이 없는 시달림의 연속이었다.
자기 몫의 작업복도 안 돌아와 교대 때 앞사람의 소위 「지까다비」 신발과 시꺼먼 무명 작업복을 받아 작업을 하는 처량한 몰골들이었다.
그러나 첫 3개년 계획 동안에는 시가를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모자라 주택건설은 인민군 거리와 「스탈린」 거리 등 간선도로 주변에 「아파트」를 몇 개 세웠을 뿐이고 본격적인 착수는 60년 전후. 나도 이때 윤환선 주변의 「아파트」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져 나르기도 했다.
그러나 벽돌을 만들 자재 공급이 달려 단층집은 대부분 진흙과 모래의 범벅에 볏 집을 썰어 넣은 토피식으로 지었고 「아파트」도 기둥만 철근이 약간 들어가고 「블록」은 대싸리를 골재로 넣은 탄재 「블록」이 고작. 자연 강도가 말이 아니어서 동평양의 어느 「아파트」는 66년께의 대홍수 때 건물째로 넘어지는 비극까지 빚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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